북유럽의 발트 해 동쪽 연안에 사이좋게 자리한 세 나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이들 나라는 우리에겐 아직 낯설지만 풍요로운 전통과 소박한 삶, 중세의 아름다움과 여행의 가치를 가득 품은 곳입니다. 늘 수많은 여행자로 붐비는 서유럽과는 달리 느긋한 일상과 중세의 흔적, 그리고 정감 가득한 사람의 향기 등 다채로운 매력으로 여행자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습니다.
1. 동유럽의 파리, 리가를 대표하는 르네상스 건축물인 검은머리 전당.
2. 빌뉴스의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은 대성당과 종탑.
3. 트라카이 역사 국립공원에는 붉은 사암의 트라카이성이 호수 한가운데에 솟아 있다.
바로크 양식의 절정을 만나다, 빌뉴스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수도 빌뉴스Vilnius는 네리스 강과 빌니아 강이 합류하는 계곡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빌뉴스라는 지명도 빌니아 강에서 유래했습니다. 분열된 리투아니아 공국을 재통일한 통치자 게디미나스Gediminas가 수도로 정한 14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의 건축물도 일부 있지만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대부분입니다. ‘비뚤어진 모양의 기묘한 진주’라는 바로크의 뜻처럼 구시가지에선 장식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국회의사당 앞 광장을 지나 천천히 걷다 보면 빌뉴스 대학과 대통령 궁을 지나 대성당 앞 광장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17세기 초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카시미르St. Casimir 예배당입니다. 성당 바깥에는 57m 높이의 종탑이 우뚝 솟아 있으며, 광장 바닥엔 리투아니아어로 ‘스테부클라스 Stebuklas’라고 적혀 있는 타일이 눈에 띕니다. 기적을 뜻하는 말로, 이 타일 위에서 소원을 빌며 세 바퀴 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이 타일은 1989년 소련에 저항하는 발트 3국 국민 200여 만 명이 빌뉴스와 에스토니아Estonia의 수도 탈린Tallinn을 잇는 인간 띠를 형성했을 당시 그 인간 띠의 마지막이 위치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빌뉴스 구시가지 곳곳에는 다양한 종파의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초록색 제단과 화려한 내부 장식의 러시아 정교회 예배당, 새벽의 문에 설치된 검은 마리아상, 독일 전통을 물려받은 루터파 교회, 빌뉴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안네 교회, 리투아니아 바로크 양식의 걸작 성베드로와 바울 교회 등입니다. 특히 성안네 교회는 고딕 건축의 아름다운 표본으로 손꼽힙니다. 1812년 러시아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이 이 교회를 보고 “손바닥에 올려놓아 프랑스로 가져가고 싶다”고 말한 일화가 전해져 옵니다. 빌뉴스 산책의 마지막 목적지로는 대성당 뒷산에 우뚝 솟은 게디미나스 성이 좋을 듯합니다. 꼭대기 전망대에 서면 빌뉴스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온통 붉은 벽돌로만 지어진 구시가지의 지붕들이 석양에 물들기 시작하면 빌뉴스는 마치 거대한 붉은 장미처럼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빌뉴스에서 남서쪽으로 28km 떨어진 한적한 호수 지대에 위한 트라카이Trakai는 14세기 초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행정과 경제, 국방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일대는 1991년부터 트라카이Traky 역사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한적한 오솔길을 여유롭게 걷다 보면 레스토랑과 보트 대여소, 기념품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나오고, 오른편 호수 한 가운데에 붉은 사암으로 지은 트라카이 성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 아래 호수 위를 떠다니는 요트들은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합니다. 이곳은 여유롭게 호숫가를 거닐다 마음에 드는 풀밭에 앉아 쉬어가기 그만입니다. 바삐 서두를 이유도 급히 뭔가를 찾을 필요도 없이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걷고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곳이 바로 트라카이입니다.
1. 구시가지 골목길의 식당 간판.
2. 게디미나스 성 전망대에서 구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여행자들
1. 내부 장식이 화려한 러시아 정교회 예배당.
2. 리투아니아를 재통일하고 빌뉴스로 수도를 천도한 게디미나스 왕의 동상과 대성당 돔.
라트비아의 창문이자 동유럽의 파리, 리가
‘라트비아의 창문’이라 불리는 리가Riga의 시작은 1201년 독일 브레멘의 알베르트 대주교가 이 지역을 무역 본거지로 삼고 ‘검의 형제 기사단’을 발족했던 시기부터입니다. 이 역사적 사실을 기념해 브레멘 시에서 동물 군악대 동상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구시가지의 랜드마크이자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성피터 교회는 약 123m의 높이를 자랑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목조건물이었습니다. 이곳 뒤쪽에 브레멘 시에서 기증한, 그림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의 동상이 있습니다. 당나귀 코를 만지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전설 때문에 코가 유난히 반질반질합니다.
1. 아름다운 벽화가 수놓인 리가의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2. 브리비바스 대로에 우뚝 솟은 자유의 기념탑, 밀다.
3. 19세기 말 유럽에서 부흥한 새로운 예술 사조 유겐트슈틸 양식의 건축물로 가득한 리가.
리가의 중심인 시청사 광장 한가운데에는 샤를 마뉴 황제의 조카인 성롤란드Roland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 동상 뒤편에 리가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검은머리 전당House of Blackheads이 우뚝 서 있습니다. 독일 르네상스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건축물은 14세기 당시 상인들의 조합인 검은머리 길드가 사용한 건물입니다. 아프리카 흑인 무어인 ‘성 모리셔스’를 그들의 수호신으로 삼은 데서 검은머리라는 명칭이 유래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어난 새로운 예술 사조가 바로 아르누보, 라트비아어로 유겐트슈틸Jugendstil입니다. ‘새로운 예술’이라는 명칭처럼 천편일률적인 이탈리아 건축양식을 배제하고 라트비아의 정신을 화려한 장식과 결합시켰습니다. 그래서 리가의 건축물을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라고 자타가 공인합니다. 건물의 1/3 이상이 아르누보 스타일일 정도로 이 도시는 아르누보의 중심지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알베르타 거리는 장식미가 넘치는 아르누보 건축물의 노천 박물관 같습니다.
또 하나의 랜드마크는 브리비바스Brivibas 대로에 우뚝 솟은 자유의 기념탑입니다. 이 탑은 ‘밀다Milda’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데, 기념비의 맨 위에 세 개의 별을 들고 있는 소녀 동상이 바로 그 이름의 주인공입니다. 세 개의 별은 원래 라트비아의 세 지역을 상징하는데, 구소련 지배하에선 발트 3국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이 탑 앞에 헌화하거나 집회를 하면 정치범으로 몰려 즉시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념탑을 ‘시베리아행 편도 티켓을 받게 하는 여행 대리인’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때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렸던 리가는 전형적인 중세 건축물부터 신고전주의, 아르누보,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양식의 전시장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유럽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리가만의 특별한 매력입니다.
1. 발트 3국의 특산품인 호박 기념품들.
2. 동유럽 최대 규모의 리가 중앙시장은 현지인과 여행자들로 늘 활기가 넘친다.
3. 거리 공연을 하는 길거리 연주자들.
발트 해의 신비로운 전설이 머무는 도시, 탈린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툼페아Toompea라 불리는 언덕을 중심으로 구시가지가 위아래로 형성돼 있습니다. 탈린이 처음 세계 지도에 등장한 것은 1154년의 일로, 14세기에 무역도시로 번영을 누리면서 탈린 구시가지의 대부분이 완성되었습니다.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왔지만, 에스토니아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여행자들에게도 친절합니다. 현대적인 건축물들 사이를 걷다가 중세의 성벽 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비현실적인 중세 풍경이 펼쳐집니다. 탈린에서 가장 유명한 중세 식당이 바로 올데한자Olde Hansa입니다. 식당 앞 계단에선 중 세 복장을 한 직원들이 피리를 불며 그 시대 선율을 선사하고, 나무 수레에선 옛날 방식대로 설탕과 계피 소스에 버무려 볶은 아몬드를 판매하기도 합니다. 올데한자를 지나면 금세 구시청사 광장이 나옵니다.
1. 시청사 광장에서 열리는 활기찬 시장 풍경.
2. 아치형 구조물이 인상적인 구시가지의 골목길.
3. 해 질 무렵의 시청사 광장.
시청사 공장에서 픽 얄그Pikk Jalg 거리를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면 탈린의 탄생지인 툼페아 언덕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선 탈린의 지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도시 너머로 발트 해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옵니다. 잠시 발트 해의 수평선을 바라보다 탈린의 기원,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을 상상하다 보면 묘하게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1. 톰페아 언덕에서는 구시가지 건물들 너머로 아스라이 발트 해가 보인다.
2. 올데한자의 직원들이 중세 복장을 한 채 구운 아몬드를 팔고 있다.
3. 색색의 구시가지 건축과 그 너머 회색빛의 현대적인 건물이 대조를 이룬 탈린.
탈린에서 허기가 지면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올데한자나 라이벌 격인 페퍼색으로 가볼 것. 내부 인테리어는 물론, 종업원들의 의상과 중세 글자체로 된 메뉴판까지 모든 것이 중세 모습 그대로기 때문입니다. 탈린의 황금 시절, 한자동맹에 연합된 상인들이 이곳에 들러 호탕하게 웃으며 게걸스럽게 식사하는 모습이 절로 떠오릅니다. ‘대상인의 연회’ ‘힘센 기사를 위한 커다란 소고기’ 등 고어체로 된 메뉴판을 읽는 일은 조금 난해하면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식사를 하다 보면 갑자기 칼을 든 중세 기사 두 명이 한 여인을 두고 검술을 펼치는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고, 식당 중간에 공연자와 손님들이 함께 어울려 흥겨운 춤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 흥겨움을 가슴에 안고 탈린의 골목길을 정처 없이 걷는 것만큼 즐거운 산보는 없을 듯합니다. 길을 몰라 헤맨다 할지라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선한 밤공기를 타고 발트 해의 신비로운 전설들이 정적 가득한 골목길을 배회하는 곳. 그곳이 바로 에스토니아의 보석, 탈린입니다.
writer 백상현(Travel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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