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나이 드는 게 무서운 연령대가 되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래도 늙는 게 꽤 멋진 일인 듯도 하군요.
불확실과 다양성의 시대, 패션계에 부는 그레이 신드롬에 대하여.
1.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 2. 돌체 앤 가바나 드레스를 입은 배우 윤여정.
얼마 전, 난생처음 흰머리 염색을 했습니다. 스트레스성 새치라고 여겼던 흰 머리카락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올해부턴 어느 방향으로 가르마를 타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죠. 나의 뒷모습에서 흰머리를 발견한 엄마는 딸이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애잔했는지, 오십견 통증을 참아가며 직접 염색을 해주셨습니다. 반면, 엄마는 2년 전 부터 염색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젠 완연한 은발인데, 외출할 때마다 모르는 사람들도 멋있다고 말해준다며 어깨를 으스대죠. 그 흔한 시술 한 번 없이 자연스럽게 주름이 늘어가는 엄마를 보며,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그 의연함이 부러웠습니다. 사회생활 10년 차를 넘긴 ‘여성’ 직장인으로서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자가 나이 든다는 사실은 사회적 약자의 자리를 견고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성차별에 ‘노인’이란 태그까지 붙으면 오죽하겠나요. 그래서인지 40대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어떻게 잘 늙어갈 것인가’와 같은 원론적인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질문의 기저에는 ‘어떻게 오래 일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깔려 있고요.
영화 <미나리>로 글로벌 영화계의 루키로 떠오른 배우 윤여정에 대한 여성들의 지지와 환호 (‘윤며들다’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그녀는 배역에 상관없이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부지런히 일했고, 75세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국내 배우 최초 오스카 시상식 후보, 미국 배우 조합상과 영국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 수상 등이 영화로 지금까지 받은 상만 무려 37개. 활약상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의 언니’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긴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전에도 그녀는 이미 2030의 워너비였습니다. ‘패셔니스타’라는 칭찬에 “그냥 입고 우기면 돼요. 뭘 소화를 해요. 내가 내 돈 내고 사 입는 건데” 라며 손사레를 쳤지만, 예능에 메고 나온 10 꼬르소 꼬모 에코백의 판매량이 30배나 증가할 정도로 영향력이 큽니다. “늙어서 협찬을 잘 안 해주니 내 옷을 입고, 옷을 사기 위해 일한다”고 말하던 그녀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디올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와 까르띠에 주얼리를 매치했으며, 최근엔 MZ세대를 주 고객층으로 삼고 있는 쇼핑 앱 ‘지그재그’의 광고를 찍으며 패셔니스타이자 대세임을 증명했죠.
(사진) 코치의 2021 S/S 컬렉션 캠페인에 등장한 데비 해리.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변화엔 사회적인 배경이 한몫합니다. 작년, 서울대 소비 트렌드 분석 센터가 가장 주목해야 할 신생산층이자 새로운소비자층으로 ‘오팔 세대’를 선정했습니다. ‘오팔OPAL’이란 ‘Old People Active Lives’의 첫 글자를 딴 약자로 ‘활동적인 인생을 계속 이어가는 노년층’이라는 뜻입니다. 58년 개띠, 즉 베이비붐 을 전후한 세대를 가리키죠. 이 ‘신중년’이 주목받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젊은 인구가 감소하고, 50~60대가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하기 때문이죠. 젊은 사람이 적은 저성장 기조에서 상대적으로 이들의 구매력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여성 소비자의 경우 자신과 가족을 위한 소비를 하는 주체로서 그 역할이 큽니다(트로트 장르의 인기와 시장이 급성장한 것도 그 증거). 또한 IT에 익숙한 오팔 세대는 소비자층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콘텐츠 크리에이터, 문화 생산자로 활동 반경을 넓히며 젊은 세대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코리아 그랜마 박막례를 시작으로 국내 시니어 모델 1호 김칠두, 60대 패션 유튜버 밀라논나(장명숙), ‘부산의 닉우스터’로 불리는 60대 인플루언서 여용기 등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지요.
1. 85세의 나이로 영국 <보그>의 최고령 커버 모델로 등극한 배우 주디 덴치. 2. 시니어 모델이 등장하는 젠틀몬스터 나노 컬렉션의 캠페인 ‘서클 오브 라이프’.
이러한 흐름은 국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계는 누구보다 발 빠르게 ‘그레이 신드롬’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과거, 백인 남성의 시선으로 상품화 된 ‘어리고’ ‘날씬한’ ‘백인’ 여성 위주의 런웨이는 아시안 모델과 흑인 모델,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등장시키며 여러 차례 성장통을 겪었습니다. 그 변화의 시간 동안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슈퍼모델들은 나이가 들고 런웨이를 떠났죠. 하지만 세상이 변했습니다. 까다로운 패션계가 인종적, 사이즈적 다양성에 이어 나이의 다양성까지 포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대표적인 예로 1960년대 비트족 패션의 전형이자 <보그> 모델이었던 페넬로페 트리Penelope Tree는 71세의 나이로 펜디 2021 S/S 컬렉션에 등장했으며, 구찌 하우스의 수장이 톰 포드였던 시절, 섹시한 모델로 유명했던 조지나 그렌빌Georgina Grenville은 평범한 캐시미어 스웨터와 캐멀 팬츠를 입고 에르메스 2021 S/S 런웨이를 활보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표현을 심화하고, 관능은 삶의 각 단계와 관련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고 밝힌 에르메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나데 쥬 바니 시뷸스키Nadège Vanhee-Cybulski는 조지나 그렌빌 외에 다양한 세대의 모델을 런웨이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매력은 세월이 지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깊어진다는 사실을, 내 세대와 후대 여성들이 항상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싶어요. 패션 디자이너로서 저는 이것을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편견 없는 캐스팅은 코치 컬렉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 스튜어트 베버 스Stuart Vevers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 팔로마 엘세서Paloma Elsesser와 함께 90년대의 스타일 아이콘이었던 모델 케이트 모스Kate Moss와 70년대 팝 아이콘 데비 해리Debbie Harry를 2021 S/S 캠페인에 동시에 등장시켜 화제가 되었죠. 그는 “소비자들이 우리가 만든 옷에서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은 런웨이를 넘어 패션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며 패션계의 긍정적인 변화에 동조했습니다. 최근 쿠튀르 컬렉션에서도 이 흐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요. 40세의 모델 마리아칼라 보스코노Mariacarla Boscono는 발렌티노 쇼의 오프닝을 장식 했고, ‘신구 셀럽 대잔치’라 불린 펜디 쇼엔 배우 데미 무어Demi Moore와 영화 제 작자 파리다 켈파Farida Khelfa, 90년대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Naomi Campbell 과 크리스티 털링턴 번즈Christy Turlington Burns 등 보통 프런트 로에 앉아 있을 법한 나이든 유명 인사들이 런웨이에 모습을 드러내 옷만큼이나 사람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샤넬의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 프라다의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등 현재 패션계를 이끌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도 나이든 언니들이 아닌가요.
캐스팅 디렉터 피에르조르지오 델 모로Piergiorgio Del Moro의 말처럼 “다양성에 대한 아이디어와 다양한 삶의 단계를 대표하는 여성을 런웨이에서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더불어 젊은 세대에게만 국한되었던 패션산업에서 연령의 변수가 넓어졌다는 것은 판매할 수 있는 소비자층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이에 대한 편견을 깨는 긍정적인 사회적 변화인지, 혹은 그저 새로운 소비자를 찾는 자본시장의 흐름인지는 지나봐야 알겠지만, 백발의 노인도 누군가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필요한 일원이라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시작점으로 돌아가 그래서 “어떻게 잘 늙어갈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배우 윤여정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고 언급한 질문에 답한 내용이 현답이 될 듯합니다. “그분과의 비교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배우입니다. 제 이름은 윤여정이고, 저는 그저 제 자신이고 싶습니다.”
editor 김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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