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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움, 장 미셸 바스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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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움


바스키아는 DJ처럼 다양한 삶을 뒤섞고 표본화시킨 후 동시대에 필요한 예술계의 관심을

요구하고 지휘했으며, 미술과 디자인, 그리고 음악에 새로운 방향을 불어넣고자 했다.


Hollywood Africans, 1983, Jean-Michel Basquiat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장 미셸 바스키아는 비록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3천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을 만큼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공고히 구축했다. 그의 삶엔 ‘극적인 순간’이 몇 있다. 이러한 순간들은 곧 그의 삶의 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바스키아는 1960년, 부유한 아이티 출신 이민자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는 학구열이 높은 어머니 덕분에 미술관을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언어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좌) Anthony Clarke, 1985, Jean-Michel Basquiat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우) Ransom Note: CEE, 1984, Toxic © 2020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ADAGP, Paris


Six Crimee, 1982, Jean-Michel Basquiat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어머니는 그에게 있어 ‘예술의 씨앗’ 같은 존재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본 것이 그가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열망하게 된 이유이고, 그의 작품 속에 해골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8세 때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바스키아가 심심해하지 않게 해부학 책을 가져다준 어머니 덕분이다. 하지만 바스키아의 안정된 유년 생활은 10대 시절 급격하게 뒤틀렸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헤어지게 된 것. 이후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그의 삶은 축복보다는 불만과 우울,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다. 두 번째 극적인 순간은 그가 다니던 예술 학교인 ‘시티 애즈 스쿨’에서 알 디아즈를 만나 1977년 ‘SAMO’라는 그래피티 크루를 결성한 것이다. ‘매우 흔하고 시시한 것(Same Old Shit)’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SAMO는 표면적으론 뉴욕 거리 벽에 가득 채워진 뻔한 그래피티 작업을 진행했지만, 이들의 작업은 힙합 음악처럼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늘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에 가까웠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은 상이했다. 디아즈는 유명세를 거부하며 영원히 길거리 예술가로 남길 바란 반면, 바스키아는 동시대의 예술을 주름잡았던 ‘앤디 워홀’이나 ‘키스 해링’처럼 스타가 되길 원했다.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래피티 작업에 저작권(Copyright)을 표기한 것도, SAMO가 뉴욕 예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자마자 ‘SAMO IS DEAD’라는 그래피티 작업을 통해 활동을 끝낸 것도 모두 두 사람의 이러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 번째 극적인 순간은 바스키아의 재능을 알아챈 미술 비평가이자 코디네이터인 르네 리카드를 통해 앤디 워홀을 만난 것이다. 워홀은 리카드가 그랬던 것처럼 단박에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 불러들였다. 워홀은 뉴욕 미술계에 ‘바스키아’라는 이름을 알리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명성과 재력, 뛰어난 마케팅 실력이라면 바스키아라는 젊은 예술가를 돋보이게 하는 일은 꽤나 수월했을 것이다. 실제로 바스키아는 워홀을 만난 후 거리 예술가 이미지에서 완벽하게 탈피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워홀이란 존재가 그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위) Boombox, 1983, Futura © Futura 2000 / Wave 5 Communications LLC (아래) Untitled, 1982, Futura © Futura 2000 / Wave 5 Communications LLC


바스키아는 유명인에 기대기보다 오로지 자신이 경험한 삶과 세대, 그리고 학문을 통해 놀라운 작업을 선보였지만, 그의 성공을 질투하는 예술가들과 언론은 그를 늘 비방했기 때문이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동성연애 중이다’ 같은 가십이 진짜인 듯 세간에 알려졌다. 결국 바스키아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워홀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스키아에게 워홀은 어머니와 같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가 약물 과용으로 세상을 떠난 1988년은 워홀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후 1년 뒤의 일이다.


Front and Back Album Covers of Beat Bop: Rammellzee Versus K–Rob(Tartown Record Co.), 1983, Jean-Michel Basquiat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끝없는 자기 복제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문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자유를 갈망하는 기질, 성공으로 인한 불안과 갈등, 1980년대 미국의 자본주의 세태, 힙합 문화는 바스키아의 작품 소재이자, 그의 삶을 대변하는 요소다. 이런 그의 예술적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시가 있다. 바로 보스턴 미술관에서 주최하는 <미래를 쓰다 : 장 미셸 바스키아와 힙합 세대(Writing the Future : Jean-Michel Basquiat and Hip-Hop Generation)>전이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포스트 그래피티’의 중심에 선 바스키아와 힙합 문화가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를 탐구하는 전시로 바스키아뿐 아니라 에로, 팹 파이브 프레디, 푸투라, 레이디 핑크, 리 퀴노네스, 라멜지, 토시크 등 동시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모두 1970~80년대 그래피티 아트와 힙합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받은 인물들이다. 이번 전시는 그래피티와 랩, 디제잉, 브레이크댄싱 등 힙합 문화의 기본적 요소 소개로 시작한다. 이를 위해 힙합 문화가 생겨난 직후 문화적으로 어떤 분야가 구축되고 또 어떠한 특정 현상을 만들어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스타일 워Style Wars>(1983)가 전시의 포문을 연다. 뉴욕 거리에서 태동한 음악과 그래피티는 단연 빼놓을 수 없는 공통의 주제다. 두 장르는 모두 백인 주류 문화와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외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좌) Five, 1980–1981, Fab 5 Freddy(Fred Brathwaite) All Rights Reserved, Fred Brathwaite (우) Leather Jacket, 1984, Tagged by Jean-Michel Basquiat, Blade, Cey, Dondi, Fab 5 Freddy (Fred Brathwaite), Hubert Kretzschmar, Revolt, Seen, Sharp and Zephyr Photograph © Hubert Kretzschmar


전시는 크게 작가, 영상, 음악 섹션으로 나뉘는데, 먼저 작가 섹션은 각 예술가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독특한 어휘를 개발해 그 의미를 전달하고 모호하게 만드는지를 강조한다. 뛰어난 언어와 문화적 맥락에서 단어 혼재 능력을 보여준 바스키아의 <찰스 1세(Charles I)>(1983), 건축적 규모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는 에로의 <비욘드 프레시>(1984), 판화를 통해 미술사적 참고 문헌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토시크의 <랜섬 노트Ransom Note : CEE>(1984), 그리고 젊은 시절 바스키아와 함께 힙합 앨범을 낸 경험이 있는 라멜지와의 독특한 표현 화법이 대표적이다. 이 중 특히 라멜지가 흥미로운데, 그는 바스키아가 뉴욕 거리 벽을 점령했을 당시 스프레이 한 통으로 지하철을 잠식한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래퍼였다. 그는 스스로를 ‘고딕 퓨처리즘의 창시자’라 여겼으며, 일본 애니메이션과 아프리카 전통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의상을 입고 자신만의 화법을 만들어냈다. 영상 섹션은 <스타일 워>를 뒷받침하는, 그래피티와 힙합의 융합을 다룬 찰리 에이헌의 영화이자 리 퀴노네스, 레이디 핑크, 팹 파이브 프레디, 라멜지 등이 출연한 <와일드 스타일>(1983)과 리 퀴노네스와 팹 파이브 프레디, 바스키아가 영상 제작에 참여한 밴드 블론디의 <랩처Rapture>(1981)에서 장면 일부를 선별해 보여준다.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음악 섹션은 1980년대에 호평을 받은 힙합 뮤지션과 그래피티 아티스트의 교차점을 보여준다. 펑크와 힙합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푸투라가 공연 무대에서 즉석으로 그린 대형 그림 <Untitled>(1982)과 리 퀴노네스가 1981년에 선보인 싱어송라이터 데비 해리의 초상화, 라멜지와 케이 밥이 랩을 하고 바스키아가 커버를 디자인한 힙합 앨범 <비트 밥>(1983) 등을 볼 수 있다. 


Super Robber, 1985, Rammellzee © 2020 The Rammellzee Estate


이 밖에 해부학과 신체, 그리고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문화와 기술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문화적 미학인 ‘아프로퓨처리즘’ 등을 통해 코드화되어 복제되고 복잡하게 뒤섞인 미학이 오늘날 문화를 ‘리믹스’하는 다문화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기초를 제공한다. 이렇듯 바스키아의 미술은 역동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새로운 힙합의 순간에 놓여 있다. 그와 같은 소위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불리는 사람들은 예술 역사에서 상상했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가장 혁신적이고 광범위한 시스템 중 하나를 발명했다. 그들의 작품은 매일 수천 명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들의 작품을 캔버스에 옮기고,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전시해왔다. 그런데도 미술계는 그들을 축하하기보다 계속 차별해왔기에 이번 전시는 고통과 차별 속에 놓인 예술가들이 어떻게 현실과 맞서 싸워왔는지를 더욱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현대미술에 전례 없이 다양한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이는 곧 젊은 세대의 문화이자 미학인 힙합의 태동과 성장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20년 12월, 그래피티 아트와 힙합 음악이 여전히 뜨거운 이유이다.


editor 서재우 (매거진 B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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