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FASHION /

준지의 디자이너, 정욱준과의 인터뷰

본문


디자이너 정욱준은 지난 10년 동안 하루하루를 단단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은 정욱준의 어제와 오늘에서, 다음 10년 동안 더욱 견고해질 준지의 미래를 예견해봅니다.

 

 

 

2007년 파리 컬렉션에 데뷔한 정욱준의 준지JUUN.J가 이제 꽉 찬 1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국 디자이너가 10년 동안 파리 컬렉션에 개근하는 일이 아직도 드문 일이라 매스컴에서 더욱 열띤 취재를 벌였죠.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정욱준의 인생 계획. 30대에는 자신의 브랜드를, 40대에는 파리 컬렉션을, 50대에는 여성복과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60대가 되면 그걸 모두 아우르는 패션 하우스를 설립하는 10년 단위 장기 계획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만 있어도 이미 잘 나가는 디자이너였던 정욱준은 실제로 10년 전 불혹의 나이에 다시 신인의 마음으로 인생을 재정비했습니다. 어쩌면 그 방법이야말로 즐거웠던 일이 관성처럼 하루하루를 잠식할 때 찾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돌파구일지도 모릅니다. 뭐든 10년 정도 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마련인데, 10년 단위로 인생의 새로운 버킷 리스트가 나타난다면 관성의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은 없을 테니까.

 

22번째 파리 컬렉션을 마쳤다. 벌써 22번째인데, 만족스럽게 잘 끝났나?

잘 마쳤다.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만족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브랜드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매 시즌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게 컬렉션을 준비할 때의 내 신념이다. 항상 새로운 아이템으로 변화시키는 걸 보여주고 싶고 새로운 실루엣, 새로운 스타일링을 선보이려 노력하고 있다. 매번 같은 콘셉트와 디자인으로 일관하는 디자이너들도 있고 그런 분들의 스타일도 존중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매 시즌 새로운 걸 만들어내면서 만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매달 새로운 글을 쓰는 입장에서 그 고통을 절절하게 통감할 수 있다.(웃음) 종종 창작의 고통에 무너질 때도 있지 않나?

매번 무너지긴 한다. 정확한 아이디어와 그림 하나를 탄생시키기까지 마음속으론 이미 수십 번 넘어졌다. 그래도 이 브랜드에서는 내가 제일 어른이니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혼자 있을 때 무너진다. ‘이거밖에 안 되나? 더 새로운 건 없을까?’ 하고.

  

트렌치코트나 MA-1(항공 점퍼), 셔츠 등 클래식한 아이템들을 재해석한 디자인이 늘 준지의 시그너처 스타일을 대변해왔다.

이번 F/W 시즌엔 우리가 흔히 입었던 다운재킷을 컬렉션 아이템으로 잡았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우연히 자신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에 있던 25년 전 사진을 인화해왔는데, 스물 아홉의 우리가 컬러풀한 오버사이즈 다운재킷에 후드 티셔츠, 전영록 안경과 나이키 모자를 쓰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당시에는 스포츠 브랜드들의 다운재킷이 유행이었고, 컬러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거기서 영감을 얻어 F/W 시즌의 많은 디자인을 완성했다.



지난 1월 열린 파리 패션위크의 준지JUUN.J 컬렉션.

  

지난 연말에 파리 컬렉션 진출 10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무척 많이 했다. 생각해보니 아직도 국내 디자이너가 10년 동안 꾸준히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는 일이 드물어서가 아닌가 싶다. 10년 동안의 고군분투에는 어떤 동기부여가 있었나?

우리나라에서는 디자이너가 멋진 직업으로 인식돼있긴 하지만, 아직도 창작자로서 진정으로 존경받는 직업은 아닌 듯하다. 특히 패션 전문가보다는 그 주변인이나 셀러브리티 등 미디어에 많이 등장하는, 본업을 거의 버리고 방송인처럼 사는 사람들만 존경받는 어쩔 수 없는 문화가 있다. 파리 컬렉션을 진행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자존감이 굉장히 높아졌다. 파리에서는 디자이너와 그의 창작물에 큰 존경을 표하기 때문이다. 물론 컬렉션을 잘 해내지 못했다면 어떠한 관심도 받지 못했겠지만, ‘크리에이터의 일을 존중해주는 그들의 애티튜드를 보면서 디자이너가 되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직도 더 많은 후배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착잡한 마음이 든다. 조언 혹은 쓴소리를 거침없이 해준다면?

후배들이 너무 방송이나 미디어에만 의존하지 말고 디자이너로서의 사명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솔직히 나도 파리 컬렉션을 딱 한 번 할 수 있을 만한 돈을 모았을 때에이, 모르겠다. 한번 나가봐야지. 안 되면 또 벌어서 도전하지 뭐!’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다. 돈을 벌기만 하고 더 큰 기회를 위해 쓸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좀 안타깝다. 미래에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얼마 전부터 여성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과연 여성복도 잘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 재미있다. 일단 내가 실루엣 플레이를 좋아하지 않나? 그런데 실루엣 플레이는 여자가 입었을 때 더 멋지고 극적이더라. 오버사이즈를 입어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입는 맛이 더 좋다. 여성복을 시작한 지 이제 세 시즌이 지났는데, 요즘엔 컬렉션을 디자인할 때 여성복만 그리고 있다.(웃음) 뭐든 처음 시작할 때가 재미있으니까. 그래서 아직은 새롭고 즐거운 단계다.

 

정욱준의 10년 단위 계획에 따르면, 앞으로 10년은 준지를 패션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하우스로 성장시키는 일이 남았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디자인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조명이다. 공간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게 조명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에 처음 파리에 갔을 때 그곳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했던 건 파리의 조명들이었다. 좋은 호텔에 묵은 것도 아니었는데 몇 가지 조명만으로도 그 공간이 너무 이색적이고 아름다웠다. 자연의 빛에 비교할 순 없지만, 인위적인 것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한 후 가드닝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들었다.

정원에 핀 장미를 보는 게 너무 좋아서 장미꽃을 심었다. 장미 이상의 꽃은 없는 것 같다. 나무로 심으면 정말 예뻐서 꺾인 장미꽃을 선물로 받으면 마음이 아프다. 꽃 자체만 아름다운 게 아니지 않나? 그 잎과 가시도 모두 예쁜데, 잘린 장미를 보면저렇게 예쁜 걸 왜 꺾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기특하기도 하다. 그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내니까. 그래서 더 좋다.

 

겨울이 지난했지만 결국 봄이 오고 있다.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나?

사실 난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차가운 공기가 좋아서. 초겨울 아침 일찍 창문을 열었을 때 다가오는 그 청명한 공기는 분명 가을 공기와는 다르다. 그래도 올 겨울은 정말이지 너무 추웠다.(웃음) 그래서 봄이 오는 게 싫지 않다. 초봄의 공기 역시 초겨울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다. 사실 초가을도 좋다. 뭐든 처음 시작되는 그 대목이 좋은 거니까.

 

흔들리는 인생에 위로가 될 만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정욱준 역시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고, 무너지고 넘어진다는 것. 정욱준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잠깐의 희열이입니다. 훌륭한 디자인, 피날레의 전율, 창조자로서 온전히 존중받는 느낌. 그런 짧고 강렬한 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 10년의 과제를 이뤄냅니다. 정욱준의 다음 10년이 지난 10년만큼이나 견고할 거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내일의 그 어떤 순간도 그냥 흘려 보내지 않을 것이기에 단단한 성처럼 쌓아 올린 정욱준의 미래는 처음과 같이 언제나 견고할 것 같습니다.

 


editor 천혜빈

photographer 안형준



↓↓↓


RELATED CONTENTS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