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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떠나는 경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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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DEAWAY GYEONGJU


기억 속에 담아둔 경주의 모습을 모조리 꺼내 새것으로 채웠죠.

어른의 눈으로 다시 본 경주의 아름다움은 도시 전체가 아닌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것들이었습니다.

 

(사진) 파란 하늘 아래 드러난 대릉원 고분의 굴곡. 

 

경주의 실루엣

둥글고 봉긋한 능, 버선코처럼 가뿐하게 올라간 기와지붕, 단정하게 쌓아 올린 첨성대와 태양을 등진 석가탑의 굴곡. 어른의 눈으로 좇은 경주는 그야말로 실루엣의 도시입니다. 땅 위 모든 것들이 하늘 아래 겸손히 자세를 낮춘 경주에서는 어디에서 있든 능선과 직선, 곡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높고 네모난 빌딩들이 하늘을 촘촘하게 가려버리면 도시의 선을 눈으로 좇기가 힘들지요. 경주의 모습이 새삼 달라 보인다면 당신의 시선이 얼마나 오랫동안 대도시에 머물러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주 시내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선은 아무래도 담장 너머로 올록볼록 모습을 드러낸 대릉원 고분의 곡선입니다. 

 

1. 동궁과 월지(안압지)의 아름다운 야경. 2. 단정하고 풍만한 첨성대의 선. 3. 파란 하늘 아래 드러난 대릉원 고분의 굴곡. 4. 경주의 또 다른 굴곡은 다름아닌 경주월드의 그것이다. 

 

가장 유명한 천마총과 미추왕릉 등 23개의 고분으로 이뤄진 대릉원을 한 바퀴 돌면 봉긋봉긋한 곡선을 끊임없이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대릉원이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하기 이전 경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이곳은 천년 고도의 신비로운 무덤이 아닌, 동무들과 오르내린 놀이동산으로 기억된다고 하죠. 대릉원에 담장이 둘러진 후 유년 시절을 보낸 경주인들의 새로운 놀이동산은 바로 경주 월드입니다. 이곳은 1985년에 ‘도투락월드’라는 이름으로 개장한, 의외로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형 테마파크입니다. 시내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보문관광단지에 자리한 이 경주월드에서 보이는 것은 초대형 롤러코스터의 아찔한 곡선입니다. 경주의 여느 곳처럼 거칠 것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주황색 선로가 어지럽게 교차되어 그 시작점과 끝을 눈으로 좇기 벅찰 정도지요. 대릉원의 완만한 곡선과 경주월드의 아찔한 곡선은 극적으로 상반된 천년 고도의 실루엣입니다.

 

1.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2.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신라시대 토기들. 흙의 질감이 소박하다. 3·4. 금으로 만든 그릇을 비롯해 천마총의 금관까지, 신라인들의 금붙이 사랑은 대단했다.

 

경주의 대비

포슬포슬하고 곧게 뻗은 볏짚을 얹은 초가집과 까맣고 반들거리는 기와를 얹은 기와집, 소박한 재료로 만든 풍만한 토기와 뾰족하고 빛나는 금관. 경주의 질감은 이렇듯 소박함과 화려함이 혼재되며 또한 자유롭게 대비됩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의 시작과 끝, 그리고 화려함과 소박함의 대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인데요. 특히 역사관에는 국보 제188호인 천마총 금관을 비롯해 화려한 세공의 금, 은, 금동 장신구가 즐비한데, 이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룩하며 천년 왕국의 기틀을 다져온 ‘황금의 나라’다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런가 하면 소박한 질감과 풍만한 곡선의 토기들은 신라시대 일상을 보여주는 친근한 유물들입니다. 화려한 무늬나 반질거리는 광택은 없지만, 토기의 발명으로 먹을거리의 보존이나 조리법이 발전해 신라인들의 삶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주었죠. 

 

1·3.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을 품은 불국사의 풍경. 2. 양동마을의 풍경. 기와집과 초가집의 대비를 엿볼 수 있다. 

 

돌탑과 목조건물의 대비도 수십 년 전에 다녀간 수학여행에서는 미처 찾아내지 못했던 불국사의 아름다움 중 하나입니다. 가끔 10원짜리 동전을 보고 떠올렸던 수학여행의 잔상은 눈앞에 놓인 다보탑의 새로운 발견으로 완전히 교체되었습니다. 다양한 도형미로 다듬어진 이 돌탑은 곁에 놓인 석가탑, 그리고 불국사의 목조건물들에 둘러싸여 더욱 고아해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14~15세기 때부터 경상도의 명문인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씨족 마을인 양동마을은 숲과 강, 초가집과 기와집, 과거와 현재가 서로 어우러져 존립하고 있는 곳이죠. 양동마을에 오면 곧게 뻗은 볏짚을 두툼하게 올린 초가집 너머로 반들거리는 기왓장을 올린 기와집을, 그리고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의 스산함을 입은 숲과 어느새 녹아 흐르는 개울물의 대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을 입구엔 빙빙 제자리를 돌고 있는 말 한 마리가 있는데, 이 또한 집집마다 주차된 까만 세단과 대비됩니다. 그런데 만약 과거의 경주인들이 현대의 경주로 시간 여행을 온다면, 혹은 반대로 현대의 경주인들이 신라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경주 사람들은 금세 적응해나갈 거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과거와 현재는 대비됨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죠.

 

editor 천혜빈

photographer 김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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