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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가 담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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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일상을 바라보고, 순간을 포착하고, 영혼을 기록하고

 

한평생 뉴욕에 살며 이스트 빌리지의 일상 풍경을 뷰파인더에 담아온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

 

Red Umbrella, c.1955 © Saul Leiter Foundation

미국의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Saul Leiter는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한 대기만성형 작가입니다. ‘컬러사진의 선구자’ ‘거리 사진의 대가’ ‘뉴욕이 낳은 전설’ 등 그의 업적을 두고 다양한 수식어가 뒤따르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을 향한 세상의 관심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작업의 영감을 얻거나 새로운 사진 스타일을 고안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창작 활동은 평범한 인생을 살고자 했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보다는 늘 그러했듯 아침에 일어나 카메라를 어깨에 걸쳐 메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이야말로 그에겐 최고의 작품 활동이었던 것. 이처럼 매사 서두르지 않는 천성과 평범한 것을 탐닉하는 그의 미감은 추측하건대 그가 엄격한 율법을 따르는 유대교 집안에서 자란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탈무드 학자이자 랍비였기에 그 또한 자연스럽게 랍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려 유대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루거나 누구보다 많이 아는 것을 성공으로 여겼던 집안의 가풍과 그에게 쏟아진 기대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는데, 정작 그는 랍비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의 꿈을 좇기로 결심하죠. 

 

Red Umbrella, c.1958 © Saul Leiter Foundation

회화를 좋아했던 사진가

1946년에 뉴욕으로 건너온 사울 레이터는 사진작가로 알려진 오늘날의 명성과 달리 원래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선물해준 데 트롤라Detrola 카메라를 사용해본 적은 있지만, 뉴욕에 정착한 초기까지 그는 사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죠.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뉴욕은 전후 세계 미술의 중심지였고, 추상표현주의 화파와 그들의 회화가 그 중심에 있었기에 그가 카메라보다 붓과 물감, 그리고 캔버스에 매료된 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릅니다. 사울 레이터는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회화를 좋아했던 사진가 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 등 추상표현주의 계열 안에서도 거친 붓 터치와 풍부한 색감을 구현하는 액션 페인팅 화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1947년 시카고 미술관에서 열린 서베이 전시 <미국의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Abstract and Surrealist American Art)> 에 작품을 출품할 만큼 그는 초기에 회화 영역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거뒀던 듯하죠.

 

(좌) Pull, c.1960 &amp;copy; Saul Leiter Foundation (우)&amp;nbsp;Cap, c.1960 &amp;copy; Saul Leiter Foundation

회화의 매력에 흠뻑 빠진 사울 레이터는 뉴욕 예술계에 안착하며 작가로 활동하는 이들을 친구로 사귀었습니다. 특히 추상표현주의 화가 리처드 푸세트 다트Richard Pousette-Dart, 종군작가로 활약한 사진 저널리스트 윌리엄 유진 스미스William Eugene Smith와의 만남은 그가 오늘날 회화 작가가 아닌 사진가 로 남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죠. 일찍이 자신의 예술 영역과 사회적 지위를 구축한 이들이 보기에 사울 레이터의 감각과 능력은 회화가 아닌 사진을 다룰 때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듯랍니다. 뉴욕에서 가깝게 지낸 동료와 친구의 권유로 사진을 매체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울 레이터는 초기엔 주로 흑백사진을 촬영했습니다. 분명 처음 접하는 장르였지만 그림을 그려온 덕분인지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을 사진으로 소화해냈고, 작업적 성취도 나쁘지 않았죠. 1951년에는 흑백사진 연작인 ‘The Wedding as a Funeral’(1951)이 매거진에 실렸고, 1953년엔 사진가이자 큐레이터로 활동한 에드워드 스타이컨Edward Steichen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언제나 젊은 이방인들(Always the Young Strangers)>전에 23점의 흑백사진을 걸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이 출연한 토마스 리치 감독의 다큐멘터리 필름 <사울 레이터Saul Leiter : 인 노 그레이트 허리In No Great Hurry>에서 당시 사진 작업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하게 된 자신을 향한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지만 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죠.

 

Canopy, 1958 &amp;copy; Saul Leiter Foundation

사진계의 이단아, 컬러 필름에서 패션 화보까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주변의 평가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던 사울 레이터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 사진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당시 뉴욕은 미술의 중심지로서뿐만 아니라 세계를 흔드는 다양한 이슈들이 탄생한 곳. 그만큼 사회적 의견과 입장이 중요했으며, 곳곳에 늘 마찰이 존재했죠. 사울 레이터가 속한 뉴욕의 사진계 또한 마찬가지. 1950년대 당시 사진계의 주류는 흑백사진이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포토저널리즘을 주장 한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전쟁과 시위 등 사회적 대립과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고 사진을 통해 저널리즘을 실천할 것을 주장했죠. 하지만 사울 레이터는 예술 운동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네와 뉴욕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상의 작고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죠.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는 사람,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택시와 자동차의 모습, 김이 서린 창문 뒤편에 서 있는 사람, 캐노피에 가려진 바깥 풍경,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 등 친숙하고 편안한 이미지를 촬영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생전에 그는 창문에 빗방울이 맺힌 모습이 유명인을 촬영하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고 말했는데, 그의 이러한 작업적 소신이 없었더라면 20세기 중반 뉴요커의 일상과 도시 풍경이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좌) Untitled, Undated &amp;copy; Saul Leiter Foundation (우)&amp;nbsp;Paris, 1959 &amp;copy; Saul Leiter Foundation

시대와 사회의 거대 담론을 다룬 작업만을 가치 있게 평가하는 고압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사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인물, 풍경, 그리고 시간의 영혼을 필름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의 작업적 관심이 흑백사진에서 컬러사진으로 확장됐는데, 1948년부터 컬러 필름인 코다크롬Kodachrome과 안스코 크롬Anscochrome을 사용해 사진에 생동감을 주었죠. 그의 사진은 1957년 다시 한 번 뉴욕 현대미술관의 <실험적인 컬러사진들(Experimental Photography in Color)> 전에서 소개되었고, 사울 레이터의 컬러사진 세계를 눈여겨본 아트 디렉터 헨리 울프 Henry Wolf에게 발탁되어 <에스콰이어> <하퍼스 바자> 같은 패션 잡지 화보 촬영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역시 당시 사진가로선 파격적인 행보. 대부분 상업성을 띤 패션 잡지 촬영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지만 사울 레이터는 본인 작품의 연장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술과 패션 사이에서 활동하는 걸 상호 보완적 형태로 여겼고, 무엇보다 먹고사는데 도움 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성격과 자신을 따라다니는 거창한 수식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그의 유쾌한 겸손과 거짓 없는 태도는 이단아적 기질이라기보다는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한 선구자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Untitled, 1950s &amp;copy; Saul Leiter Foundatio

서울에서 만나는 컬러사진의 선구자, 사울 레이터

지난 2013년 11월에 작고한 사울 레이터를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피크닉 Piknic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의 회고전인 <사울 레이터 :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가 바로 그것. 이번 전시는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사울 레이터의 회고전으로 그의 대표 흑백과 컬러사진 작업을 비롯해 연구 중인 미공개 슬라이드 필름, 50~60년대 패션 화보,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린 ‘페인티드 누드‘ 작업 등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다룹니다. 무엇보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그의 작업적 특성을 반영한 전시 연출과 공간 활용이 흥미로운데, 재즈 피아니스트 진수영이 층별로 다르게 작곡한 음악이 사진과 어우러지는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 사울 레이터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는 관객의 감각을 확장합니다. 암실에서 철커덕 소리와 함께 사진을 쏘는 컬러 영사기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죠. 사울 레이터는 당시 컬러 필름 인화가 비싼 탓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종종 영사 기로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곤 했는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활발하게 이어 나간 예술적 교류를 간접적으로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사울 레이터의 삶을 더욱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스니펫Snippets’도 놓쳐서는 안 될 작품. 그는 가족, 연인, 이웃을 찍은 사진을 명함 크기로 찢어서 가지고 다녔는데, 자신의 주변을 지켜주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느낄 수 있죠. 한편, 피크닉은 그의 회고전과 함께 2013년에 개봉한 토마스 리치 감독의 <사울 레이터 : 인 노 그 레이트 허리(13 Lessons in Life with Saul Leiter)>를 수입, 피크닉 시네마와 국내 극장에 배급했습니다. 사진, 영상, 영화, 음악, 책, 가구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보다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사울 레이터의 회고전은 오는 3월 27일까지 이어집니다. 

 

WRITER JEONG HUN LEE(art journ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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