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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화가 박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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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수행 


선 하나를 더 그어 내리기 위해 어제와 다름없이 캔버스 앞에 우뚝 선 화가 박서보의 오늘



“변하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으면 또한 추락한다.” 이는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단색화 운동의 선구자인 화가 박서보의 말입니다. “미리 마련해둔 내 묘자리에 이 말이 새겨질 것”이라며 영면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음을 무덤덤하게 얘기하던 화가는 문득, “그러나 나는 평생을 변화하면서 추락한 일이 없었다”고, 마치 점을 찍듯 명징하게 말했습니다. 변하지 않되 끊임없이 변화해야만 추락하지 않는다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로 명확히 구분 지어진, 완전히 다른 두 세기에 걸쳐진 그의 삶엔 지난하면서도 격동했던 한국의 근현대사가 모조리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변하지 않는동시에 완전히 새롭게 변해야만 했던 화가 박서보의 역사에 오롯이 투영되어 있죠. 그러나 구순을 목전에 둔 화가는 그의 말처럼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의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 운동인 앵포르멜Informel에서부터 서양 문화에 저항하는 60년대의 원형질 시리즈, 70년대부터 시작된묘법과 21세기인 현재의 원색 묘법 등. 그는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며 노동자와 진배없는 마음가짐으로 경건하게 그림을 그려왔으며, 이는 여든 아홉 번의 봄을 맞이하는 거장의 영혼을 시들지 않는 꽃처럼 피어오르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흔 번째 봄, 아흔한 번째 봄, 아흔두 번째 봄, 아흔 세 번째 봄… 그리고 앞으로 찾아올 더 많은 영겁의 봄날이 거장 박서보의 영혼을 영원히 꽃피우게 할 것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곧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감회가 어떤가?

A 5월 18일이 오프닝이다. 마지막 신작을 제작하느라 여념이 없다. 신작을 3~4점 선보일 예정이라 작업실에서 나오기가 힘들다.(웃음)


Q 50년 동안 하루 14시간씩 작업해왔다. 2009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는 조금 줄일 수밖에 없었다는데, 요즘엔 작업실에 매일 몇 시간씩 머무르나?

A 올해 여든아홉 살이 되었는데 요즘도 8~10시간을 꼬박 서서작업한다. 오전에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작업실에 들어가서 수없이 선을 긋고 앉아 있다.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 긋는다. 이번에 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회고전 타이틀이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다. 원래는 니체의 말을 인용해 ‘위대한 노동자’라는 타이틀로 하려다 내게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기 망설여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난 ‘노동자’란 말이 참 좋다. 난 예술을 한 게 아니라 평생 노동만 했기 때문이다. 그게 반대로 예술을 한 거나 다름없다. 내 손톱에 이렇게 하얀 물감이 잔뜩 껴 있지 않나. 밖에 나갈 땐 이걸 어떻게 해서든 다 긁어내고 나간다. 그림은 내가 작업실에서 하는 일이지, 밖에 나가서 화가 티를 내며 돌아다니고 싶진 않다.


Q 작업실, 주거 공간, 갤러리 겸 라운지를 더해 집을 짓고 ‘박서보 아트 기지’라 명명했다. 언덕을 오르며 보이는 기지의 외관이 단색화와 무척 닮아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든다.

A ‘기지’는 다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군사기지의 베이스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기발한 재치라는 뜻도 된다. 예술가가 살던 집을 사후에 미술관으로 쓰곤 하니까, 내가 죽으면 이 기지가 박서보 기념관이 되는 거다. 내 그림을 감상하면서 자연을 바라볼 수 있게 갤러리 겸 라운지에 긴 이끼 정원도 만들었다.


Q 박서보의 작품과 함께 길고 긴 이끼 정원을 서울 도심 주택가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현재와 미래에 방문할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될 만한 풍광이다.

A 해외에서 많은 손님들이 내 그림을 보기 위해 방문한다. 그림을 꺼내고 포장을 벗기고 하다보면 멀리서 온 손님들을 제대로 맞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서 그들이 편히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아예 갤러리 겸 라운지를 만들었다. 특히 이끼 정원이 기가 막히지. 거의 20m에 달하는데, 여기 놓인 돌도 전부 비 오는 날 문경새재에 가서 직접 고른 것들이다. 다만 자연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키 큰 화초들은 배제하고 오로지 이끼와 돌만 놓은 것이다.



Q (벽에 걸린) 삼대가 함께한 가족 사진이 인상적이다. 언제 찍은 것인가?

A 재작년 말에 큰아들과 작은아들 내외, 손주들과 찍은 것이다. 내가 아들 둘에 딸 하난데, 딸은 스케줄이 안 되어 같이 찍질 못했다. 딸은 생긴 모습도 성격도 날 제일 많이 닮은 녀석인데, 유명한 저술가로 1년에 많을 땐 다섯 권씩 책을 낸다. 얼마 전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진 적이 있었는데, 우리 딸이 “아버지가 벌써 89세가 되어 돌아가실 나이가 됐구나” 하고 날 껴안고 우는 거다. 그러고선 아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하더니 3개월 만에 내 일대기에 대한 책 한 권을 뚝딱 썼다. 금년 6월쯤 나올 것이다. 또 처남이 영상을 제작하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매형이 이제 죽을 나이가 됐구나’ 하면서 예전부터 내 모습을 조금씩 찍어오던 걸 가지고 만든 ‘천진의 미학, 비움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타이틀의 영상을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Q 그 영상의 타이틀처럼 ‘비움’의 정신을 늘 강조해왔다.

A 영상 제작할 때 한번은 처남이 내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길래 내가 이렇게 말했다. “예술 그거 별거 아니야 이 사람아. 그거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난 늘 예술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말한다. 그게 뭐 별거냐는 거지. 언젠가 TV 방송에서 1시간짜리 대담을 한 적이 있다. 그들도 ‘예술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그때도 “그거 별거 아닌 거야. 사람 밥 먹고 똥 싸는 거랑 똑같다”고 대답했다. 말인즉슨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대단하지 않은 거라 생각할수록 더욱 대단해지는 게 예술이다. 해외의 방송국이나 신문사들과 인터뷰할 때도 ‘젊은 작가들에게 충고해 줄 말씀은 없느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내 대답은 “책을 많이 읽어라. 많이 읽되 절대로 기억하지 말아라. 다 버려라. 다 토해내고 다 버려라. 그래야만 한다”였다. 

사람들이 책의 명구 같은 걸 읽고 자꾸 얽매여 있는데, 그러면 발전하지 못한다. 나는 책을 읽고 다 버린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녹용이나 인삼은 달여서 보약을 해 먹지 않나.끓여서 물만 마시고 껍데기는 다 버리듯, 읽은 것들은 이미 내 속에 들어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기억하지 말라는 거다. 거추장스러운 건 다 버려야 자신이 자유로워진다. 


Q 번민이 많은 현대인에게 ‘비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늘 수월하진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A 색화 작품을 영민하게 읽어내지 못하면 그 시선은 그저 ‘색’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단색화 운동은 동양 정신이다. 색이 희끄무리하거나 거무스리한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색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니 ‘단색화’라는 말은 사실 맞지 않는다. 날 비워내는 것, 모든 걸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 이게 단색화다. 전에 영국 테이트갤러리 리버풀Tate Gallery Liverpool에서 열렸던 그룹전 타이틀을 ‘코리아 모노크롬’으로 한다길래 관장을 설득한 적이 있다. 색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라고. 그래서 ‘워킹 위드 네이처Working with Nature’로 바꿨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보는 서양인들에게 나를 드러내는 대신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길 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Q 단색화의 기본 정신은 목적과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속에 있는 것 같다.

A 단색화는 첫 번째로 ‘그린다’는 행위가 무목적성이어야 한다. 뭘 그리고자 하는 목적이 없어야 된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그 행위가 반복적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 비춰볼 때 요즘 우리 화단에 나오는 단색화 작품 중에는 기본 정신은 완전히 다르고 무늬만 단색화인 것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행위의 무목적성, 반복성을 통해 자신을 비워내야 한다. 마치 스님이 하루 종일 목탁을 두드리며 “나무관세음보살” 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그림은 나를 비워내고 수신하는 도구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수행자가 된다. 그림은 그저 그 수행 과정을 통해 나온 찌꺼기이며 내게 그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Q 단색화의 정신이 ‘비움’에 있다며, 21세기 인류에게 있어 예술의 역할 은 ‘치유’의 도구임을 늘 강조해왔다.

A 나는 소위 20세기의 예술가다. 20세기의 70년 동안 나는 아무 불편없이 잘 살아온 사람이다. 아날로그 시대가 나를 잘 감싸줬고, 그 안에서 나는 굉장히 독특한 작가였는데, 디지털 시대인 21세기에 들어서는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내가 이 시대를 새롭게 해석하지 못하면 삼류 작가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역사적으로 처지는 작가가 되는 건 죽어도 싫었다. 아날로그 시대를 성공적으로 산 삶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냥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여러 번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아니다, 끝까지 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사후에 놀림받는 작가가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작가로 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날로그 시대의 작가인 내가 이 디지털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끝없이 고민해봤다. 그러다 디지털 시대에는 지구 전체가 스트레스로 병동화되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디지털 시대의 전환 속도가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추락하며 이 지구 전체가 스트레스로 둘러싸인 것이다. 

이 시대 예술은 ‘이미지’라는 밑바탕에 작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캔버스에 잔뜩 토해놓는다.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작가의 이미지로부터 매일같이 폭력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그 예술은 맞지 않는 것이다. 이 시대의 예술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편해지고 행복해지고 안정을 찾을 수 있게 스트레스를 빨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을 치유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21세기의 예술의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이 메시지를 전 세계를 향해 외치고 있다.


editor  천혜빈

photographer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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