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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 >의 배우 이서준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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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삶

 

배우 이서준은 스스로에게 왜 연기를 하는지 묻기보다 ‘연기를 하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법’을 찾아가고 있다.

Editor 천혜빈
Photographer 우상희

 

Q: 지난해 김한민 감독의 작품 <명량>의 후속편인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에서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후보로 오를 만큼 정말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극중 변요한 배우가 연기한 왜적 수군의 최고사령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조카이자 왼팔로 활약하는 ‘와키자카 사헤에’ 역할이었는데, 삭발도 하고 일본어로 연기해야 했던 터라 고생이 많았겠다 싶다.

추가 촬영까지 합쳐 거의 1년간 민머리로 살았던 것 같다. 시대극이다 보니 일본어도 요즘 쓰는 현대어가 아닌 고어로 연기해야 했던 것도 기억에 남고. 갑옷과 투구 등을 착용하면 거의 20kg이 넘어서 밥을 많이 먹는데도 살이 계속 빠지기도 했다. 특히 해상 전투 신은 크로마키 스크린에서 상상하며 연기해야 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바다와 거북선 등이 있다 가정하며 액션 연기를 해야 했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재미있는 추억이 더 많은 작품이다.

Q: 촬영 기간이 길다 보니 일상에서도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은데.

특히 민머리로 1년여간 살다 보니 머리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많다. 살면서 처음 겪었던 일인데, 엘리베이터를 탈 때 사람들이 나를 피하더라.(웃음) 코로나 시국이라 밤에 운동 끝나고 대충 입고 민머리에 마스크만 쓰고 집에 들어가는데, 아파트 주민 분들이 나를 보고 먼저 올라가라고 하시거나 갑자기 전화 통화를 하는 척하면서 엘리베이터에 같이 안 타시는 거다.(웃음) 그 후로 모자를 꼭 쓰고 다녔다.

 

Q: ‘사헤에’ 역뿐 아니라 독립영화인 <울보>에선 비행 청소년, 드라마 ‘우월한 하루’에선 형사 등 늘 강렬하고 센 역할들을 도맡아 하고 있다.

내 얼굴의 장점이라면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는 남에게 민폐 안 끼치고 조용히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고.(웃음) 그런데 악역 등 센 역할에 자주 캐스팅되면서 ‘감독님들 눈엔 이런 이미지가 포착되는구나’라는 걸 알 수 있게 돼 오히려 더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맡은 역할들이 실제 성격과 거리가 있다 보니 인간의 악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더욱 흥미롭게 분석하게 된다.

Q: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자주 영화를 보며 자랐다고 들었다. 지금 이렇게 배우가 된 것도 그러한 영향이 큰 듯한데, 처음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나?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 “연영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가 워낙 말씀이 별로 없으신 경상도 사나이라 “힘들 텐데 괜찮겠냐?” 한마디 하시더라. 그런데 이제 막 열여덟 살 된 애가 뭘 알겠나? “하고 싶습니다!” 했지. 그 후로도 크게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신 적이 없다. 독립영화인 <울보>라는 작품이 개봉해 아들이 나온 영화를 보셨을 때도 그저 “고생했다” 한마디 하셨다. 그래도 <한산>이 개봉했을 땐 티 나게 기뻐하셨다.

Q: 배우란 매번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하는 직업인데, 그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왜 없겠나?(웃음) 최근에도 그런 두려움을 어떻게 떨쳐낼지 많이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 충북 음성에 촬영하러 갔는데, 계속 대본을 보며 연습하면서도 불안하고 떨렸다. 그런데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게 느껴질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물론 최선을 다해 연습하되, 슛 들어가기 직전엔 ‘아니면 어쩔 수 없지. 일단 그냥 해보자’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선배님들이 다들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시더라. 특히 첫 촬영 현장에 가면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요즘엔 어떤 영화가 개봉하면 거기 출연한 선배님들의 인터뷰를 유심히 본다. 그분들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들, 그리고 그 이면에 분명히 존재했을 불안감에 대해 생각하며 ‘지금 이 정도 역할에 내가 떨면 안 되지’ 하고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산책을 많이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게 두려움이나 불안 증세에서 벗어나는 데 좋은 방법인 것 같다.

Q: 하루 루틴이 궁금하다.

아침 루틴을 정확히 지키는 편이다. 촬영이 없을 땐 보통 오전 9시에 눈을 떠 “지니야”를 외친 후 그날의 뉴스 등을 브리핑받는다.(웃음) 잠이 좀 깨면 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정신이 가장 맑을 때 대본을 보거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조금 뒹굴거리다가 운동 다녀와서 집 청소하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면서 집 근처 빵집에서 빵을 사 오기도 한다.

 

Q: ‘정신이 맑을 때 책을 읽는다’니, 굉장히 모범적인 일상이다.(웃음) 술은 안 마시나?

활자 읽는 걸 좋아한다. 주로 연기 이론서 번역본을 많이 보고, 인문학 책도 많이 읽는다. 지하철이나 버스 타고 이동할 땐 오디오 북도 자주 듣고.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져서 술은 잘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30대가 되니 조금만 마셔도 몸이 무겁고, 숙취도 이틀 지나야 없어지더라.(웃음)

Q: 궁극적으로, 왜 배우라는 일을 하고 싶나? 그리고 배우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나?

연기를 진로로 선택하기 전 많은 고민을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으니 주변 친구들은 다 뚜렷하게 가고 싶은 학과가 있어 그에 맞는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데, 나는 딱히 그런 게 없는 거다. 그래서 어느 날 집에서 앞으로 뭘 하면 좋을지 하나하나 적으며 체크한 적이 있다. 첫 번째로는 경영학과에 진학하는 것. 사업을 하거나 경영 컨설턴트를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으로 법학과, 사진과, 체육학과, 연영과 등을 쭉 적어봤다. 그런데 사진을 그렇게 잘 찍거나 성적이 썩 우수한 편도 아닌데 법학과나 사진과에 진학하는 게 내게 어떤 비전이 있겠나 싶더라. 그렇게 하나씩 지우다 보니 연기가 남았다. 연기는 그전에도 조금씩 수업을 듣곤 했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때 가장 즐겁고 설렜던 거지. 그래서 고2 때 연영과에 가기로 하고 아버지께 결심을 말씀 드렸다. 요즘엔 스스로에게 ‘나는 왜 연기를 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내가 왜 연기를 해야 할까?’는 ‘내가 왜 살지?’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태어났으니까 살아가고 있고, 그걸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것뿐이다. 물론 이게 나한테 맞는 길인지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좌절과 고통이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에 또 다른 벽이 서 있는 것조차 내가 그만큼 걸어왔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만약 다른 일을 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면 고통과 좌절로 허우적대다 포기했을 텐데, 연기는 그렇진 않다는 거다. 아무리 힘들고 답답해도 살면서 유일하게 놓지 않았던 것, 배우라는 일이 내겐 그런 것이다.

 

Q:얼마 전 촬영을 마친 OTT 작품들,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 작품 등 새해에도 여러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래도 연기 말고 올해 꼭 해보고 싶은 것과 먼 미래에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전부터 뉴욕의 액팅 스쿨 같은 곳에서 수업을 받아보고 싶었기 때문에 올해는 뉴욕에 꼭 한번 가보려고 한다. 그래서 유튜브로 열심히 뉴욕 브이로그 같은 영상을 많이 보고 있다.(웃음) 살다 보니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잊고 살다가 갑자기 2주 전쯤 촬영이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문득, ‘아, 내가 늘 유학을 가고 싶어 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올해 안에 꼭 뉴욕에 가서 연기 수업을 받는 것이 목표이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연기를 가르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열심히 살다 보면 먼 훗날 학생들에게 내가 깨우친 것들을 들려줄 수 있는 날도 오겠지

 

 

<더 갤러리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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