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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자, 이수지 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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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물의 이야기

 

이수지의 그림은 물처럼 흐른다. 자유롭고 유연하게, 언제든 어디로든.

 

지난 2월 22일은 국내 출판계에서 잔치를 열어도 좋을 소식이 여럿 들렸던 날이죠. 그중 하나는 세계 최대 규모와 권위를 자랑하는 어린 이 책 전시 행사인 ‘볼로냐 아동 도서전(Bologna Children’s Book Fair)’에서 우리나라의 그림책 작가인 이수지가 <여름이 온다>라는 작품으로 볼로냐 라가치상(Bologna Ragazzi Award)의 픽션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같은 날 들려온 또 다른 낭보 는 그가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올해 최종 후보 6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인데요. 이수지 작가는 중국의 차오원쉬엔 작가 글에 삽화를 넣은 <우로마>라는 작품으로 작년에도 라가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16년에도 이미 한국 작가 최초로 안데르센상 후보에 오른 이력이 있는, 그야말로 ‘작가들의 작가’ ‘월드클래스 작가’로 불리며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아티스트랍니다. <여름이 온다>는 여름날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모습을 강렬한 터치 의 드로잉과 색종이 콜라주, 담채와 수채 등 다양한 기법으로 담아 낸 역동적인 그림책이죠. 이 책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림과 음악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점인데, 작가는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모티브로 여름날의 풍경을 그림과 음악의 서사로 가득 채웠습니다. 심지어 책엔 비발디의 ‘사계’를 들을 수 있는 QR 코드를 실어 독자들이 책을 펼쳐가며 마치 ‘여름’의 1악장, 2악장, 3악장을 듣는 듯한 느낌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했죠. 최소한의 텍스트와 생동감 넘치는 선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차원과 차원, 장르와 장르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자유를 선사하는 이수지 작가. 족히 수백, 수천 권이 넘을 듯한 그림책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과 커다란 작업 테이블 너머로 오래된 피아노 한 대가 눈길을 끄는 그 의 작업실에서 음악과 그림, 아이와 어른, 자유로움과 유연함에 대해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세계적 권위의 어린이 도서상인 볼로냐 라가치상의 픽션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같은 날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의 최종 후보에도 올랐는데(3월 중순 기준), 소감이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발표가 난 게 2월 22일이었는데, 오전엔 안데르센상 주최 측으로부터 메일이 왔고, 밤엔 라가치상 주최 측으로부터 수상 소식을 전달받아 굉장히 놀랐죠. 라가치상은 ‘이맘 때쯤 발표하겠거니’ 하고 잊고 있었던 터라 그랬고, 안데르센상은 아직 발표를 앞두고 있지만 워낙 쟁쟁한 후보들이 많아 그분들과 함께 최종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상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후보로 일본의 저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인 아라이 료지처럼 일생 동안 작업해오신 작가들이 선정돼 있어 수상 욕심을 내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것 같았죠.(웃음)

초창기에 이수지의 작품 세계를 꿰뚫어보고 책을 출판해준 곳이 다름 아닌 이탈리아의 코라이니 에디치오니Corraini Edizioni라고 들었습니다. 피카소로부터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평가를 받은 세계적인 북아트 작가 겸 디자이너인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의 책을 출판해 아티스트 북의 개념을 세계에 알린 저명한 출판사죠?

라가치상도 그렇고, 이탈리아와 인연이 있나 봅니다. 벌써 20년도 더 된 것 같아요. 서양화과 졸업 후 전시도 하면서 틈틈이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했죠. 문득 일러스트레이션 자체보다는 책을 매체로 삼은 파인아트 작업을 해보 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마침 영국에 짧은 코스의 북아트 석사 과정이 있어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그때 볼로냐에서 북페어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지만 단순히 재미있는 곳이라는 얘기를 듣고 석사 졸업을 위해 만들었던 <이상 한 나라의 앨리스> 책 작업 샘플을 들고 무작정 그곳으로 갔습니다. 볼로냐 북페어에 갔더니 신인들이 작업을 들고 와서 출판업자들에게 보여주면 흔쾌히 봐주고, 시간이 나면 이 것저것 얘기도 해주면서 여기저기 소개시켜 주는, 굉장히 재미있는 분위기였죠.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누군가가 “여기가 네가 좋아할 만한 책을 많이 만드는 곳이야” 하며 코라이니 출판사 부스에 데려다주었습니다. 내 책을 보여줬더니 “흥미로우니 다 완성되면 한번 보내봐라” 하시길래 보냈다가, 그렇게 내 책이 출간되었답니다.(웃음)

이번에 라가치상을 수상하게 된 <여름이 온다>는 148페이지로 꽤 분량이 많은 게 특징입니다. 작업 기간이라든지, 진행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막연히 머릿속에서 발전시켜 온 것만 해도 몇 년이 걸린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세하게 계획을 세워 작업을 진행한 것도 아니죠. 이렇게 책이 두꺼워지게 페이지 수를 늘 려야겠다는 생각도 애초에 없었고, 그냥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처럼 1악장, 2악장, 3악 장으로 나누어서 되는 대로 작업해보자는 생각으로 그려서 묶은 것뿐. 이를테면 처음엔 그저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편을 들으면 유독 가슴이 설레는 느낌이 들어 아이들과 함께 자주 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도 이 음악이 ‘내가 아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돼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집이 늘 클래식만 듣는 그런 집은 아니랍니다.(웃음) 아무튼 그걸 그림에 접목시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게 말이 쉽 지, 굉장히 추상적인 것을 또다시 어떤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게 쉽지 않아서 몇 년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의 물놀이를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게 비발디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어 재작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이 책의 작업을 시작하게 됐죠. 그때부터는 정말 불붙듯 열심히 해서 6개월 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를 모티브로 하거나 뮤지션과 그림책 작업을 하는 등 음악과의 접목을 자주 시도하는 편이신데요. 그리고 이수지의 그림책을 보고 전 세계 뮤지션들이 자주 음악을 만들어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이수지의 작업은 음악과 연이 깊은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웃음) 내가 실제로 음악을 하거나 잘 알지도 못하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음악을 아주 좋아합니다. 어떨 땐 그런 생각이 들죠. 텍스트 없이 그저 흘러가는 그림책 안에 서 리듬을 느낄 수 있으니 내 책이 음악을 하는 분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 같다는. 실제로 <파도야 놀자>는 기타리스트들이 그 책을 보고 연주곡을 만들어 많이 보내주기도 했어요. 흥미로운 점은 그분들의 특징이 그 음악으로 뭘 어떻게 하고자 한 게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저 ‘네 그림책을 보고 내가 음악으로 한번 만들어봤어’ 하고 노래를 보내오는 것뿐. 그러면서 서로 감상평을 주고받는 것도 무척 즐겁습니다.

뮤지션인 루시드폴과 함께한 <물이 되는 꿈>이라는 책도 큰 화제가 됐습니다. 그가 쓴 글에 삽화를 그려 넣었는데, 5m가 넘는 병풍 같은 속 지와 새파란 색감이 인상 깊었죠. 책에 루시드폴의 ‘물이 되는 꿈’을 들을 수 있는 QR 코드가 실려 있어 독자들이 이 책을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루시드폴은 그림책 작가들을 워낙 잘 아시고, 번역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나 또한 평소 그의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죠. 항상 음악을 모티브로 그림책을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계기가 없었는데, 마침 그런 제안을 받은 게 좋은 동기가 된 것입니다. 물론 장르는 다르지만 그와의 작업이 있었기에 후에 비발디도 시도할 수 있 었던 것 같아요. 다음엔 또 어떤 음악을 모티브로 작업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그런가 하면 작품 속에 물에 대한 모티브가 많이 나옵니다. 아이들의 물놀이를 담은 <여름이 온다>도 그렇고, <파도야 놀자>와 루시드폴과 협업한 <물이 되는 꿈>도 마찬가지.

의도한 건 전혀 아니었는데, 어느 날 편집자가 “그런데 다 물이네요?”라는 말을 해서 깨닫게 됐어요. 생각해보니 나 자신이 자유로운 물의 속성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물론 갖다 붙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지만.(웃음) 루시드폴의 ‘물이 되는 꿈’이라는 노래가 좋았던 이유도 ‘물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가사가 좋아서였어요. 그런 태도를 취하면 살면서 해결되는 문제들이 많으니까. 이번에 뭘 관철시키겠다든지, 어떤 걸 반드시 완성해야겠다는 태도보다는 그걸 해나가는 과정 중에 맞닥뜨리는 갈등과 문제 앞에서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하면 해결되는 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나 강연 영상을 보면 ‘자유’ ‘유연’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방금 얘기한 ‘물의 속성’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이는데요. 

그게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이어서 자주 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기본적으로 예술가는 본인이 자유롭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자유’란 일견 흔한 말이고 너무 일반적으로 쓰이는 어떤 것일 수도 있지만, 항상 상자 밖으로 자유롭게 나와 있어야 내가 어디 있는지,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이라는 매체로 작업을 하면 더 자유롭게 사고해야 하고, 틀에 갇히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갇혀 있으면서 누군가에게 자유로워지라고 말할 순 없으니까. 이렇게 될 수도,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다른 시도를 지속하며 스스로 숨구멍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자유’ ‘유연’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어른들을 보면 뭐랄까,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지 않는 공통 점이 있습니다. ‘전에 했던 말을 이번엔 또 어떻게 다르게 말할까? 어떻게 달리 접근해 볼까?’ 하고 항상 모색하는 사람들이죠. 그런 습관을 지닌 이들과는 모든 대화와 상황이 새롭게 느껴지고 저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죠.

라가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이른바 ‘월클’ 작가이다 보니 이 수지를 보고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이 점점 더 많아질 듯합니다. 이들에게 조언이나 해줄 말이 있다면?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그런 것들 말이죠.

다들 엄청나게 잘하고 있기 때문에 조언해줄 말이 없어요. 정말이죠.(웃음) 신인 작가들을 보면 흑역사도 없더라고요.(웃음) 난 초창기 작업을 다시 보면 빨리 역사 속에 묻혀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이 엄청 많은데….(웃음) 다들 처음부터 어쩜 그렇게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히려 내가 배울 게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처음 볼로냐 에 가서 외국의 그림책들, 특히 프랑스 그림책을 보면 특유의 감각적인 색채와 디자인을 우린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가겠다 싶었는데, 요즘 우리나라 작가들을 보면 어느새 그런 장벽이 사라진 것 같고, 오히려 한국 특유의 굉장히 날것 같으면서도 강한 에너지까지 갖추고 있어 놀랍기만 하죠. 그래서 최근 우리나라 그림 책이 해외에서 더욱 주목받는 게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그런 걸 배워서 할 수 있는지, 내가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로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즐겁답니다. 

<선>이라는 그림책 첫 장엔 ‘어린 화가들에게’라는 말을 써놓으셨습니다. 

<선>은 내가 어릴 적 그림 배울 때 얘기를 담은 <나의 명원화실> 같은 느낌의 책입니다.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너무 기능위주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에서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리다가 어떤 수준 이상의 테크닉이 나오지 않으면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애’ ‘난 그림에 재능이 없어’라고 생각하고 끝내 버리는데,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그런 것에 대한 이해도가 전반적으로 낮은 듯합니다. 누군가에게 ‘못 그린 그림’ ‘잘 그린 그림’으로 평가당해 끝낼 게 아니라 ‘내가 긋는 선으로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야’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쓴 말이죠. “너희가 긋는 선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섭니다. <선>에선 한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지며 좌절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것마저 즐거워하는 장면이 나오죠. 또 여러 사람들이 줄지어 스케이트를 타면서 그들이 함께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갑니다. 이렇게 열린 태도로 대하지 않으면 예술과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무엇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DITOR 천혜빈 

PHOTOGRAPHER 고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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