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코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 코코카피탄은 오히려 오늘을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What are we going to do with all this future?’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뉴욕과 밀라노의 번화가 건물 외벽에 삐뚤빼뚤 적힌 이 글귀는 지난해 구찌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널리 알려진 스페인 태생의 포토그래퍼 코코 카피탄Coco Capi-tan(이하 코코)의 손 글씨입니다. 코코의 이 메시지는 구찌의 벨트 백과 티셔츠, 그리고 후디와 백팩에 새겨져 전 세계에 퍼져 나갔죠.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새로운 전시의 주인공인 코코는 패션 사진을 전공했지만 한 장르에 국한되기보다는 페인팅, 영상, 설치, 그리고 핸드라이팅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해온 스물여섯 살의 젊은 작가입니다. 구찌 컬래버레이션에서 선보인 핸드라이팅 작품과 함께 삶과 죽음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 자아 발견과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한 작품, 스페인 올림픽 대표 수영 선수들의 포트레이트를 통해 도전 정신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 등 총 150여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를 위해 코코가 서울을 찾았는데요.
구찌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서일까? 이 젊고 ‘핫’한 작가를 다루는 전 세계 미디어는 오히려 작가 자신보다 더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미래를 점치기 좋아하는 미디어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이 어린 작가의 미래를 예견하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한데요. 예상도를 그리기 위해 조바심이 난 그들이 ‘그 다음엔 뭘 보여줄 건데?’ ‘갑자기
찾아온 성공에 오히려 미래가 불안하지 않아?’라고
물으며 대답을 재촉할 때, 말간 얼굴의 코코는 초연하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중요한 건 오로지 앞으로 하게 될 또 다른 흥미로운 일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일
뿐이라고.
(좌) boy in Socks, London, UK, 2017, C-type Print (우) Hasta La Vista, London, UK, 2015, C-type Print
본거지인 유럽도 아닌 아시아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최초로 연다는 사실에 많이 압도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예상보다 더 큰 전시장 규모에 놀랐다는데.
대림미술관 내부가 생각보다 더 커서 놀랐어요. 이곳을 찾는 어마어마한 방문객 수에 한 번 더 놀랐고. 무엇보다 가족 단위나 젊은 층의 방문객이 많다는 사실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내가 사는 런던은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 그마저도 비평가나 예술가 같은 관계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한국 사람들이 일상에서 빠져나와 캐주얼하게 예술을 즐기는 모습이 매우 좋아 보입니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도 개인전을 열 수 있을 만큼 알려진 데에는 아무래도 지난해 화제가 됐던 구찌와의 컬래버레이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어요.
구찌와 진행한 핸드라이팅 작업은 커리어에 대한 내 철학과 태도를 바꿔놓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우선 구찌가 내 사진이 아닌 핸드라이팅 작업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놀라웠죠. 어떻게 하면 좋은 사진가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사진 작업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지만, 핸드라이팅 작업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 늘 노트 한 귀퉁이에 끄적이는 걸 좋아했지만 그걸 예술이나 상업적인 면에 연결하려고 의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예술이든, 상업적인 작업이든, 뭘 의도하기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걸 정직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쨌든 그 ‘끄적임’이 코코 카피탄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 됐죠. 뉴욕과 밀라노의 건물 외벽에서도, 서울 거리를 걷는 패션 피플들의 티셔츠에서도 당신의 손 글씨를 발견할 수 있게 됐어요.
미디어나 브랜드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며 한작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소한 끄적임’에 전 세계인이 보이는 반응엔 놀라지 않을 수 없아여. 거리에서 내 글씨가 적힌 구찌 티셔츠를 입었거나 벨트 백을 멘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직도 충격적일 만큼 크게 놀라고 있답니다.
구찌 컬래버레이션에서 가장 크게 다뤄진 핸드라이팅 문구 중 하나인 ‘Common sense is not that common’은 ‘상식이라는 게 꼭 모두에게 똑같이 통용되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느낀 후 끄적인 문구라고 들었어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데 분명 그 문구를 쓰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기억나더라도 그걸 이 자리에서 밝히면 안 될 것 같아요. 어디선가 그 사건의 주인공이 볼지도 모르니까.(웃음) 내겐 너무나도 명확한 상식이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겠거니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종종 깨닫곤해요. 우리 모두 사람들과 대화할 때 ‘아, 내가 생각하는 상식이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지 않나요?
‘What are we going to do with all this future?’는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뜻에서 쓴 글귀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친구와 함께 코스타리카에 여행 갔다가 새해 전날 밤을 보낼 때 쓴 문구랍니다. 12월 31일에는 다들 새해 소망을 빌지 않나요? 그런데 소원을 빈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그게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심리가 굉장히 흥미로웠죠. 거기서 이 문구에 대한 영감을 얻었어요. 저는 평소에도 인생이라는 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내버려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죠. 생각해보세요. 인생 대부분의 좋은 일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일어나지 않나요?
스스로를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낙관주의나 비관주의 그 어느 쪽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그저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할 뿐. 그러나 어떤 일에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종 비관주의적 면모를 발견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내가 바라거나 기대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후 예상치 못하게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쁨이 배가되니까.
자유분방했던 스페인에서의 유소년 시절과 달리 엄격한 영국의 교육 방식에 적응하면서 느꼈던 점을 위트 있게 표현한 작품들도 인상적이더라구요. 두 문화의 충돌이 개인적 성장에 큰 여파를 미친 것 같던데 맞나요?
런던으로 유학 온 건 개인적 발전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었어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나고 자란 후 18세 때 런던에 와서 느낀 문화적 충격을 작품으로 만들었죠. 스페인 남부 끝에 자리한 내 고향은 밀레니얼 세대의 사고방식이나 자본주의, 소비주의와는 거리가 먼 곳이에요. 그래서 패션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오늘 뭘 입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자라지도 않았어요. 그러다 영국에 건너가니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 엄청났죠. 트렌드가 있고, 그걸 따르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회적 양상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나 역시 점차 어른이 돼 가며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바라볼까?’ ‘어떤 브랜드를 좋아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며 문화적인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 없게 되었어요. 한편으론 그러한 내면의 변화로 인해 사회적 현상들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죠.
그런가 하면, 삶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도 이색적입니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메시지는 ‘죽음도 삶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삶에서 죽음까지 이르는 여정이 짧게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이 얼마나 짧은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미 없는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 ‘죽기 전에 나는 살고 싶다(Before I die, I want to live)’라는 문구로 핸드라이팅 작업을 하기도 했죠. 식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나 스스로도 늘 기억하기 위해 한 작업이에요.
Girl in Yellow, Courtesy of Gucci, Milan, Italy, 2017, C-type Print
죽음을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인 <코코Coco>가 생각나더라구요.(웃음)
안 그래도 비행기 안에서 그 영화를 보고 엄청 울었어요.(웃음)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가 스페인의 문화와 아주 많이 닮아 있어서 무척 공감했죠.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게 마련이니, 죽음 또한 부정적인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죽음이 있기에 살아 있는 이 순간을 더욱 열심히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티스트로서 열심히 작업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저의 자세죠.
세계적으로 갑자기 유명해진 젊은 작가들은 지금의 화려한 성공보다 다음 단계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게 다가올 것 같아요. 브랜드나 미디어에 의해 이미지가 엄청나게 소비되고 난 후인데, 앞으로 선보일 다음 단계에 대한 불안감은 없나요?
미디어와 대중이 다음에 선보일 내 작업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영향 받지 않으려고 해요. 성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내가 집중하는 건 오로지 어떤 흥미로운 작업을 할 것인가 뿐. 시대의 트렌드를 이끌겠다든지, 또는 이 시대의 잇 걸이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가끔 이렇게 미디어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열심히 작업하는 게 내게 주어진 몫이라 생각하고 그 외적인 부분에선 크게 상호작용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것이 아티스트로서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구요.
이제 20대 중반이에요. 자아 탐구에 대한 포트레이트 작품들에서도 묻어나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시기인 20대가 참 어중간한 것 같은데요.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 이번 전시는 삶과 죽음, 그리고 ‘오늘’에 대한 메시지로 가득한데... 일찍 애어른이 돼버린 것 같아요.
커리어를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어요. 한편으론 그래서 더 어려지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면 책임은 덜하고 더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프로페셔널한 아티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어린아이처럼 마냥 자유롭게 살 순 없죠. 작업엔 딱히 끝이라는 게 없고,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니까요.
이번 전시를 통해 코코 카피탄을 알아갈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거나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오늘을 사랑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건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오늘이니까.
photographer 안형준
editor 천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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