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이불의 텍스트는 누구에게나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습니다. 뭐든지 그녀의 재료와 이슈가 될 수 있고, 그녀의 접근 방식과 삶의 태도가 어떻게라도 흘러갈 수 있는 것처럼.
리노베이션을 위해 9개월간 휴관했던 아트선재센터(이하 ‘선재’)에서 지난 8월 말부터 <커넥트 1 : 스틸액츠>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는 1~3층 각각 김소라, 정서영, 이불의 개인전 형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중 이불은 1998년 선재 첫 개인전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11월 20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선재가 소장하고 있는 ‘사이보그’ 시리즈 4점을 비롯한 기존 작을 지금의 선재 공간에 변주해냈습니다. 생선이 썩어가는 과정까지 작업의 일부가 된 ‘장엄한 광채’, 바닥을 덮는 철제 구조물인 ‘딜루비움’, 7분 28초짜리 영상 ‘아마츄어들’, 사운드 설치 작업인 ‘화이트 노이즈’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불은 1980년대부터 시각적으로 다소 충격적인, 때론 시각 이외의 감각까지 동원하는 작업을 선보여왔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단순히 감각적인 차원의 충격을 주는 데 그치지 않았죠. 기괴한 코스튬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퍼포먼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낀 줄 아냐?’와 연성 재료를 사용한 부드러운 조각 ‘몬스터’를 통해 신체를 기괴한 형태로 변형시켰고, 죽은 생선을 비즈와 시퀀으로 장식한 ‘화엄(‘장엄한 광채’의 옛 작품명)’은 후각을 전시장으로 불러들이는 동시에 여성에게 강요되는 획일화된 ‘꾸밈’의 폭력성을 지적합니다. 2000년대부터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인류의 역사적 사건과 결합하는 ‘나의 거대서사’ 시리즈를 이어온 이불은 최근 자신의 관심사를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작업의 스케일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이 의도한 특정 상황에 불러들여 그 상황을 겪게 만드는 것. 시드니 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극히 일부를 전시 중인 ‘취약할 의향’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군가는 이불의 작업을 ‘몸’의 서사, 즉 생명체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로 읽어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녀를 기존 관념과 거대 서사에 맞서는 투사이자 이슈 메이커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녀의 작업을 어떻게 바라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그녀가 사상적인 폭력에 맞서고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양한 분야와 영역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와 재료, 이슈와 공간을 찾아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단 세상에 내놓은 작업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온전히 관람자에게 맡기는 것이죠.
최근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 훈장을 받게 됐죠.
미술뿐 아니라 영화, 음악, 문학 등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주는 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나름대로 프랑스와 인연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25년 동안 작업해오면서 새로운 테마를 선보인 중요한 순간들은 거의 대부분 프랑스에서였으니까.
프랑스와의 첫 인연을 기억하나요?
1997년 리옹 비엔날레. 같은 해 그보다 먼저 뉴욕 현대미술관에 썩어가는 생선 작업을 설치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제 작업을 미술관 측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놨습니다. 냄새 때문이었죠. 공식적인 철거는 아니었지만 거의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옮겨놨으니 사실상 철거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그때 리옹과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이었던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제 작업을 보러 왔다가 상황을 파악하고 원래 의도한 대로 리옹에서 쇼를 선보일 수 있게 적극 추진했습니다. 덕분에 당시 상당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이불 <장엄한 광채>(2016)
선재에서 함께 전시 중인 김소라와 정서영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작가들입니다. 1층과 2층에선 각각 그들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데, 3층만 이불과 뮤지움의 그룹 쇼 형태이죠.
애초 전시 의도가 선재 초기에 개인전을 연 작가들 그리고 선재가 소장하고 있는 그들의 작업이 현재 어떤 방식으로 유효할 수 있는지 짚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활동했던 이들의 작업을 보여준다면 내가 어떤 분위기에서 그 작업을 했는지 일종의 시대적인 맥락을 제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당시의 작업을 보관하고 있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고, 어떻게 전시할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논의됐습니다.
작업 설치 과정은 어떤 식으로 진행했나요?
최대한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모든 작업을 한데 보여주는 방식으로 배치했습니다. 철골 구조물인 ‘딜루비움’을 전시 공간 바닥에 넓게 펼쳐뒀고, 이것을 따라 혹은 피해서 걷다 보면 위치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작업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풍경처럼 작업들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하나가 다른 하나의 너머에 있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한 작업이 다른 작업을 압도하지 않고 저마다 적당히 개성을 발휘하면서도 서로 어우러지게 신경 썼습니다. ‘장엄한 광채’에서 생선을 담은 비닐 팩에 부패 속도를 늦추고 냄새를 약화시키는 약품인 포타지움을 첨가한 것도, 비닐 팩 98개가 붙어 있는 벽면을 반투명 비닐로 크게 둘러 둥근 방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화엄’의 2016년 버전인 ‘장엄한 광채’는 이름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변경했습니다. 크게는 포타지움을 첨가했다는 사실부터 사소하게는 생선의 종류까지도.
1~2주짜리 전시는 포타지움 없이 설치한 적도 있습니다. 약품이 없으면 일주일도 안 돼 냄새 때문에 근처에 갈 수 없을 만큼 부패 속도가 빠릅니다. 앞서 말했듯 이번 전시는 다른 작업들도 함께 선보이므로 그 힘을 조율해야 했습니다. 3개월이라는 전시 기간의 호흡도 맞춰야 하고. 초기에 도미를 재료로 고른 건 아름답고 절개 있었다는 도미부인 설화에서 영향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이슈 중 ‘도미’가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합니다. 드라이하게 개념적으로 보면 생선 형태를 빌린 ‘몸’에 관한 서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으니까. ‘왜 도미가 아닌 조기냐?’보다 ‘계속 도미일 필요가 없다’에 가깝습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이불 <사이보그>(1998), <아마츄어들>(1999), <딜루비움>(2012)
'아마츄어들’이라는 영상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업입니다. 서사가 없고 카메라의 시선이 계속 바뀌면서 화면이 흔들리고요.
영상에 존재하는 건 ‘10대 소녀들이 카메라를 갖고 논다’는 설정뿐입니다. 카메라는 ‘보는 눈’을 의미합니다. ‘보는 것’이 주체, ‘보이는 것’이 객체가 되는데, 소녀들이 놀면서 카메라를 주고받다 보니 카메라는 무엇을 바라볼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것을 봐야 하는 상황, 주체여야 하는 것이 주체가 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혼란스러움과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는 것. 영상을 보고 바로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 없습니다. 낯설고 당혹스러운 느낌이 드는 게 중요하니까.
작업이 단순히 설치된 게 아니라, 공간 구석구석에 펼쳐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간결하게 에센스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저는 이상하게 한자리에 얌전히 정돈하는 게 갈수록 작업이 퍼져 나가서 잘 안 됩니다. 아이디어도 한 군데가 아니라 보이는 곳 여기저기에 써놓고.
한 인터뷰에서, 감정이 배제된다는 점에서 조각을 선호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죠.
2009~2010년쯤이었나? 마음먹고 페인팅을 해보다 1년 만에 포기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막연한 감정 상태가 튀어나와서. 조각은 즉석에서 만들어 내놓아도 재료의 물성이 있고 일정한 시간이 걸리므로 구체적인 감정이 개입되기 어렵습니다.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만 일관성 있게 유지됩니다. 감정이 배제돼야 좋은 작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형편없거나, 너무 사적이라 내놓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잘 맞지 않을 뿐.
자신의 작업 결과물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티스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용기를 지닌 것 아닌가요?
그게 용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뻔뻔함이 아닐까요? 회의가 많고 자기 검열이 심하면 아무리 근사한 생각과 능력도 절대 외부에 보여주지 못하지 않습니까. 아티스트는 자기 안에서 결론 나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건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용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내년에는 작업을 잠시 쉴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뜸을 오래 들여서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듭니다. 그러다 갑자기 벼락처럼 몰아쳐서 작업하고, 남은 에너지로 또 다음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렇게 수십 년간 작업하다 보니 지치기도 했습니다. 미친 듯이 하는 것도 아니고 푹 쉬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뭉개는 생활에 브레이크를 걸기로 했습니다. 물론 막상 내년이 되면 또다시 쫓기면서 작업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불의 전시, 아트선재센터
아트선재센터에서 만날 수 있는 <커넥트 1 : 스틸액츠>전. 다음 주 토요일인 11월 12일에는 '이불과 아즈마 히로키의 대화'라는 타이틀 아래 일본의 문화 비평가이자 소설가, 철학자인 아즈마 히로키와 함께 이불의 작업 세계를 새롭게 조망하는 토크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 동시대적인 고민과 소장품에 대한 재해석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싶다면 방문해 보세요.
editor 강경민(프리랜서)
photographer 안형준 / 아트선재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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