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LIFE /

대한민국 사진계의 거장, 구본창 인터뷰

본문

 한국 현대사진계에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구본창'이라는 이름이 자리할 것입니다. 보도사진이 주를 이루던 한국에 '예술 사진'을 정착시킨 대표적인 사진가죠. 사진 속 피사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교감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과 공명의 시간을 쌓아가는 내면을 가진 사진가 구본창. 그의 정적으로 분주한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5월 어느 날, 사진가 구본창의 작품이 세계 곳곳의 갤러리에 동시에 걸려 있었습니다. 도쿄의 토미오 코야마 갤러리는 그의 ‘백자’ 시리즈 13점을 선보였고, 파리의 갤러리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이탈리아 작가 스테파노 비앙키Stefano Bianchi와의 2인전으로 그를 초대했습니다. 더 터미널 교토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그의 작품이 포함된 그룹 전시를 진행하고 있죠. 이외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수많은 프로젝트들을 위해 그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겠지만, 정작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구본창의 자택 겸 작업실에서 시간은 그의 사진처럼 고요하게 흘렀습니다. 30여 년간 그가 모은 물건과 작업한 결과물들이 나름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었죠. 아주 가끔 잠시 말을 멈출 때마다 그 모든 사물들이 저마다 내뱉는 얕은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의 백자를 찾아 다니며 단아하게 프레임에 담아낸 ‘백자‘ 시리즈를 떠올리면 의아하겠지만, 사실 구본창의 작품 세계는 꽤 다양한 변천사를 거쳐왔습니다. 셀프 포트레이트나 도시 풍경, 타인의 몸, 연약한 곤충까지 폭넓게 다루던 초기엔 4장의 사진을 한 작품으로 구성하거나 여러 장의 인화지를 실로 재봉해 커다란 조각보처럼 만드는 식의 형식 실험이 눈에 띄었죠. 하지만 임종을 맞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숨’ 시리즈로 기록하고 나서 그는 한동안 바다, 강, 눈 등의 정적인 장면들을 추상적으로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탈, 소반, 백자, 곱돌 등 한국적인 소재로 눈을 돌린 후부터는 탈과 백자에게 주어진 것 같은 전형적인 이미지를 벗겨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위) ‘탈’ 시리즈(가산 오광대), 2002. 
(아래) VESSEL(JM 04-2 BW), 2006, Location of Pottery : Japan Folk Crafts Museum Tokyo.


 구본창이 다루는 모든 소재에는 그만의 시선이 존재합니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잡아채 영원의 숨결을 불어넣는 매체인데요. 구본창은 자신의 주된 관심사가 “시간이 만든 이야기를 기록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셔터를 누르는 시간은 1/125초에 불과하지만, 그에게 셔터를 누르기 전과 셔터를 누른 뒤의 시간은 지난하게 깁니다.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촬영해 기록할지, 그 기록을 어떤 방식으로 인화해 보여줄지 고민하는 시간이죠. 

 또한 그는 시선을 획득하기 위해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 대상을 관찰하다가 빛과 렌즈, 사물과 배경의 조합이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나면 그는 비로소 조심스레 카메라 뒤에 섭니다. 그제서야 각각의 요소들이 서로 작용하며 일종의 교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죠. 구본창은 이 조용한 회동의 주최자이자 내밀한 쇼의 진행자입니다. 마치 커튼 뒤에 숨어 나지막이 주문을 외는 마술사처럼,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사물과의 교감이 일종의 에너지처럼 필름 속에 스며든다고 믿습니다.”


   구본창과 나눈 이야기들 

민화를 주제로 <보그> 5월호에서 패션 화보를 촬영했습니다.
내가 패션 사진도 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방직 사업을 하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늘 천을 보고 만지며 자란 탓에 섬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엔 같은 학교에서 패션을 전공하는 친구들의 졸업 작품을 촬영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패션 사진을 시작한 건 귀국하고 몇 년이 지난 1989~90년 무렵입니다. 하용수 디자이너가 부탁한 알렉시오라는 브랜드의 카탈로그였죠. 그 카탈로그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사진들이 마치 영화 스틸처럼 스토리가 있어 보입니다. 

처음엔 로케이션 장소로 미리 봐둔 청파동의 창고 앞에서 야외 촬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구경을 나오는 통에 집중할 수가 없어 황급히 건너편 당구장으로 장소를 옮겼죠. 재미있게도 오히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이 더 마음에 듭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찍어온 사진도 중간에 집어넣고, 디자이너가 인화지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등 의욕적으로 다양하게 시도한 결과물입니다.


연극, 영화 포스터 촬영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198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순수 사진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어요. 때마침 친구인 배창호 감독이 영화 포스터를 한번 찍어보라며 제안한 덕에 영화계에 발을 디뎠죠. 연극 포스터는 이윤택 연출가와 연이 닿아 촬영했고, 리빙과 디자인 분야의 잡지 화보도 찍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일들이었지만 모두 즐겁게 했어요. 


구본창이 촬영한 영화 포스터들 (왼쪽부터) 이창동 감독의 <시>,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태백산맥> 


테크닉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힘’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대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나요?
작은 것 하나도 금방 찍지 않고 오랜 시간 뜸을 들입니다. 지금 이 작은 상자는 페루 리마에서 1달러쯤 주고 사온 것인데요. 벼룩시장에서 보자마자 상자 안에 뭔가 들어 있을 것만 같고 사연이 있어 보였어요. 이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지나다니면서 보기만 한 게 두 달이 넘었죠. 상자가 자꾸 내 눈에 띄면서 날 유혹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빛에서 어떤 배경에 놓고 어떻게 찍어야 상자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깨닫게 됩니다. 그 대상의 본질과 숨은 매력을 찾아내는 시간이 작품의 깊이를 만들죠. 그렇다고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발표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부터 어떤 종이에 어떤 방식으로 프린트해서 보여줄지 새로운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런 면에서 작년에 출간한 사진집 <백자의 시간>에도 엄청난 공을 들였습니다. ‘백자’ 시리즈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점을 가장 신경 썼나요?
백자가 들어 있는 수장고를 서서히 여는 듯한 기분이 들도록 디자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러 번 접힌 책을 만들게 됐죠. 공정이 어려워지다 보니 제본에 가장 많이 신경 썼습니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황금’ 시리즈는 어떤 작품인가요?
황금은 인류 역사에서 오랜 욕망의 대상입니다. 황금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공통적으로 황금을 장식에 사용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금관과 우리나라의 금관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이런 황금을 과연 새롭게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백자’ 시리즈의 출발점도 비슷합니다. 전통적인 유산이면서 누구든 갖고 싶어 하는 백자를 재해석해보자는 의도에서 백자를 흰색이 아닌 핑크색으로 찍게 됐으니까요. 호기심만 품고 있던 중, 작년에 우연히 호주의 금광 지역에 초대를 받았어요. 그곳에서 운 좋게도 개인의 황금 컬렉션을 촬영할 기회가 생겼죠. 지난 2월엔 리마의 박물관이 소장한 잉카의 황금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발표한 적이 없는 작품이죠. 


한 번에 서너 가지 시리즈를 번갈아가며 작업하는데,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비결이 있나요?
뇌의 용량을 최대한 넓혀 쓰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새 작업을 구상하는 층, 하던 작업을 지속하는 층, 옛 작업을 정리하는 층 등 머릿속을 여러 갈래로 나눠놓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꺼내 씁니다. 난 뇌를 라디오 트랜지스터처럼 사용한다고 말하는데요. 한 가지 일을 하다가 다른 일로 넘어갈 땐 이전 일의 스위치를 끕니다. 정확히 말하면 10% 정도 켜둡니다 절전 모드인 셈이죠. 그래야 바로바로 전환이 가능하거든요. 정물 작업을 전시하러 파리에 갔다가 패션 화보에 배경으로 쓸 천이나 종이를 사온다든가 하는 것처럼요. 예전에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그도 한 번에 여러 편의 소설을 쓰는데, 소설 하나를 집필할 때마다 노트북을 산다고 합니다. 노트북 하나로 한 편의 소설만 작업하니, 소설마다 전용 노트북이 있는 셈이죠. 읽으면서 크게 공감했어요. 나도 새 시리즈를 작업할 때마다 새 책상을 사서 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이 방에선 패션 작업만 하고, 저 방에선 정물 작업만 한다든가요. ‘황금’ 시리즈를 시작했다면 빈 방에 황금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모아놓고 프린트를 걸어두는 식으로, 머릿속처럼 실제 공간을 나누는 거죠. 


작업 외에 전시와 책 출간, 특강과 기획 등 수많은 일을 함께 해왔습니다.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지칠 때는 없나요?
대부분 사람들과의 약속에서 비롯된 일들이니, 결국 신의의 문제입니다.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책임지려고 노력하죠. 약속을 지키려 하다 보면 혼자 뭔가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시간을 최대한 확장해서 쓰려고 합니다. 1분을 3분처럼, 30분을 1시간처럼 집중해 사용하죠. 이것도 훈련이 됩니다. 테니스를 처음 칠 땐 공이 엄청나게 빨라 보이게 마련이지만 실력이 늘면 공이 땅에 떨어졌다가 정점을 찍는 게 눈에 보입니다. 그러면 공이 다시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 치면 되는 거죠. 


언제, 어떻게 쉬나요?
연휴 때만큼은 푹 쉰다. 휴대전화도 꺼놓고 완벽하게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청소도 하고, 어질러진 물건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초저녁에 잠들었다 새벽 2~3시에 일어나 서류 더미를 뒤적이기도 한다. 내가 워낙 물건을 많이 모으지 않나. 오늘의 나를 만든 예전의 메모, 소품들을 꺼내 보고 제 위치에 집어넣으면서 즐거운 추억을 되새긴다. 그러다 새로운 아이템이 떠오르면 삶의 활력소가 된다.


해외에서 구입한 종이나 천을 촬영에 사용하기도 하고, 여행지의 호텔에서 쓰던 비누를 갖고 들어와 ‘비누’ 시리즈를 작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외에도 여행에서 꼭 사거나 가져오는 물건이 있나요?
신문, 잡지, <플라이어>처럼 각 지역의 특징이 드러나는 인쇄물들이요. 


유학 시절, 작업의 전환점이 된 조언과 소중한 인맥을 제공해준 이가 독일의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Andre Gelpke였습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그에 대한 감사를 표했는데, 최근 겔프케를 만나거나 연락한 적이 있나요?
재작년에 생 모리츠에서 전시를 하게 되어 스위스에 갔다가, 취리히에 들러 겔프케 선생의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듬해, 그가 30년을 벼르던 한국행을 계획했어요. 한국에 와서 내 작업실을 구경한 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독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지만, 출발 직전 건강상의 문제로 아드님만 서울에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선물을 갖고 왔어요. 2014년 겔프케 자택 건너편에 있던 약국이 폐점하면서 갖고 있던 소품들을 쇼윈도에 진열해놓고 판매하고 있었는데, 내가 방문한 날은 아쉽게도 약국이 문을 닫는 일요일이었습니다. 갖고 싶었던 알루미늄 박스를 사지 못해 아쉽다는 내 이야기를 선생이 기억하고 있다가 두 개를 구입해 아들 편에 보내주셨어요.


그 외에 지금껏 받은 선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뭔가요?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무렵, 독일인 친구가 내가 좋아하던 글귀를 실크 스크린으로 프린트해 티셔츠를 만들어줬습니다. 독일인인 그는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는 글귀였어요. ‘정전반수(庭前畔樹) 충천심(衝天心) 암하세천(岩下細川) 달해의(達海意)’.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요?
우선 ‘백자’ 시리즈 전부터 해오던 빈 공간을 다루는 작업을 마무리 지어 책으로 완성하고 싶습니다. 이 (리마에서 산) 상자도 그 일부입니다. 그 외에는 장기적으로 지금까지의 작업들을 정리해 아카이브로 만들고 싶어요. 촬영만 하고 인화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요. 지금 이 건물 뒤에 새로 건물을 하나 더 짓고 있습니다. 필름과 프린트, 내가 모은 소품들을 적당한 규모의 아카이브로 만들려고 합니다. 


삭발 장면을 담은 ‘무제’라든가 ‘열두 번의 한숨’ ‘탈의기’ 등 셀프 포트레이트를 비롯한 초기의 작품들은 불안하고 예민한 청년을 그대로 투영했습니다. 반면 현재의 인상이나 최근작들은 반대로 안정적이고 평화롭습니다. 30년의 세월 속에서 겪은 어떤 사건 때문일까요?
1995년 임종 직전 아버지의 모습을 ‘숨’ 시리즈로 담아내면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상처가 치유되고 한국에서 사진작가로서 내 역할에 보람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의 처절함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내면엔 여전히 그 시절의 흔적이 화석처럼 남아 있죠. 


구본창 전시, 국립 현대 미술관 (5.4-7.24) 

 구본창의 작품을 가까이서 눈으로 만나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감상하세요. 1989년 이후 30년간 한국 현대 미술과 사진이 어떤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왔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다음 달 24일까지 진행되고 있으니, 꼭 들러 구본창 작가의 사진에 담긴 숨결을 느껴보세요! :) 



Editor 강경민
Photographer 박정훈 /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연관기사]

푸드 전문가가 꼽은 한국 대표 맛집 6
국내 패션 디자이너, 차세대 스타는 누구?
칼 라거펠트 스타일링 클래스 후기


RELATED CONTENTS

댓글 영역